역사.문화유산

조선왕조 제5대 문종

土譚 2008. 9. 8. 22:22

문종의 등극 배경


왕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1421 년으로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 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18년)으로 향의 나이 23 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결심했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다면 세종은 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 고,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 다. 첨사원은 고려 때 동 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딴 것으로 이는 충 렬왕 이후(1276년) 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 제도를 임 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 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 자 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 편, 모 든 관원을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 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 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 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 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 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문종의 성품및 업적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 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 수 및 산 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 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 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 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 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 이 증대되 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 말기에 세종 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 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 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고 안간 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 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 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 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 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 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 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 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 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 리돼 있던 군제 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 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야만 했다. 이 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 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측 양씨에 게 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에 있으며, 현덕왕후도 이 곳에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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