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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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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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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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대 강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 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 조는 삼전 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 편, 소현세 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 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 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 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모든 일 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 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 일 것이다. |
인조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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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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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렬왕후 한씨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 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 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 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 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 소용과 세 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 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 가 철저한 친청주의 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 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 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 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 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 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 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 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 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 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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