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파의 대윤파 제거
인종 즉 위 당시에는 한 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 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 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 력의 제거 작 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 을 당시 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 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 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 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 인 사림 세력들 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 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 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 킨 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 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 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 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 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 이 때부터 명종은 그들 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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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 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 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 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 한 권력 다툼을 일으 켰다. 이 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 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 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 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 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 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 려고 음모 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 되었다. 이 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 삼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 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 생했다.
중종에 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 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 (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 대 논란이 벌 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번 째 계비 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 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 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 형(소윤)의 대립 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 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 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 언적 등 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 에 세상을 떴으 며, 12세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 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 공한다. 이 결 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 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 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 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 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 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 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 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 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 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 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 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 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 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 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 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 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 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 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 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 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 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등용되었다. 이 사건 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 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 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 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 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 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 주의 사죄와 통교 재 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 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 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 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 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 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 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 을 앞세우고 전라남고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 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횅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 하였다.
이에 조 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 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 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 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 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악화되었다. 조 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 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 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 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 어 도요 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 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
인순왕후 심씨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 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되 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 67년 명종이 죽자 대 비가 되어 16세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 다. 죽은 후 명종의 능인 강릉에 묻혔다.
순회세자
순회세자는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1557년 일곱 살 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임의 딸 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 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 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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