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중심으로의 변화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 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 을 유배시 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 세력의 유 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 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 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 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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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남인견제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 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 제해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 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 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 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 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 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 수 허적을 비롯한 대 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 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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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득세와 남인의 정권독점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 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 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 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 격시켰다. 이에 대하 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 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 열 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 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 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 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 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 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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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강등과 갑술환국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 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 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 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 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 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 을 후회하고 있던 중 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버린다. 그 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 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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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의 옥과 노론의 대거진출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 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 가 있 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 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 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 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 를 빌었고, 이 사 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 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 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 여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 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 정에 진 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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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사건들
이 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정 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 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 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 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 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 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희 이 후 여러 학자 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 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 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 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 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 론 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 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 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 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 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 에 대한 유생들의 공 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 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 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 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 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 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숙종의 업적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 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 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 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 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 를 주조 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 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 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 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 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 설하고 5 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 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 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 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 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 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 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 와 국경 분 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 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 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 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 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 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 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 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 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 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 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 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 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
숙종의 용사출척권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 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 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 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 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 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 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 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 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 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 생시켰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 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 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 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 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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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 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 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고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 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 으며 청서파 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 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 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 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 를 주장하는 사류 (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 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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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의 계기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 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 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 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오히 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에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 자 윤증과 사적인 감 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 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 파되었다.
이리하 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 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 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 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 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 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 국). 이 때 노론 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 도 대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옥사로 남 인이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앙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 빈 장씨와 관련하 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 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 을 운영해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대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 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 상 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 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하지만 영조 대 중반에 집권당이던 노론은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벽파는 영 조편에 서서 장헌세자의 죽음 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 무리였고 시파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동정 하는 무리로 이루 어졌다. 이 때 세력이 약했던 소론은 시파에 가담했 다. 이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는데, 영조 대에 는 벽파가 우세하였으나 정조 대에는 시파가 우세 했다. 그러나 순조 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의 딸 영조 계비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 라 다시 벽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순조1년(1801년)에 일어나는 신 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와 이에 동조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노 론 독주시대가 전개된다. |
인경왕후 김씨
김장생의 4대 손인 광성부원군 김만 기의 딸이다. 1670년 열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 갔으며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 비에 책봉되었 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 증세가 보였는데, 이 때 숙종은 천연두를 겪지 않은 터라 약방도제조 영 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라 편전을 창 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경덕 궁에서 세상을 떴다. 이 후 경덕궁 영소전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익 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인현왕후 민씨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1681 년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왕자를 낳 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 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숙 종은 1689년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노론의 송시열 등이 이 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진노를 사 서 사사되었다. 이른바 기 사환국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에서 인현왕후 역시 왕의 미움을 받아 서 인으로 강등되어 폐 출된다. 이 후 그녀는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게 되 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 왕 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폐비 복위운동 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복위되었다. 복 위 후 그녀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며 지내 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소생 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 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능호 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후에 숙종도 이 곳 에 함께 묻혔다.
인원왕후 김씨
경은부원 군 김주신의 딸이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회생했 고 2년 뒤에 혜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 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명릉으로 인현왕후, 숙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에 묻혔 다.
희빈 장씨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 때 그녀가 장렬왕 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 문이 돌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 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 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 격되었으며 이 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 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 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 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 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 월에 균을 세자에 책 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 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 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 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 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 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 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 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 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 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 으며 권대운, 목내 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 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 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 위되었던 민씨를 복위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 고 한다.
갑술옥 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직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 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희빈 장 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 와 관련된 문구 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 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 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 비가 죽기 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 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 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 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 를 일 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 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 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 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 릉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