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유산

조선왕조 제20대 경종

土譚 2008. 9. 23. 18:06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 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 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 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 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 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 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 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 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 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 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 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 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 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 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 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 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 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 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 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 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 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 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 반을 굳혔다.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 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단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 고자 모의했다 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 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 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 망, 김성행 등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 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 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 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 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 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 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 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 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 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 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 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 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 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 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경종의 작은 업적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 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단의왕후 심씨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 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 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린 나이에도 대전, 중전 그리고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 다. 1720년 경종의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 다.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선의왕후 어씨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이다. 1718년 세 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 었다. 이 후 1724년 경종이 죽자 2년 뒤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 26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였으 며 경종이 병약한 탓에 소생이 없었다. 죽은 후 경종이 묻혀 있는 의 릉에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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