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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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 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 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 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 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 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 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 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 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 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 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 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 반을 굳혔다. |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 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 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 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 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 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 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 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 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 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
경종의 작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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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왕후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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