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유산

조선왕조 제22대 정조

土譚 2008. 10. 1. 09:01

'세도'의 유래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 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 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 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 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에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 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 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고의로 홍국영 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규장각의 발전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 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 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 에 상관 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 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갈 수 있었다.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하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 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 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전라도 진신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 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 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 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 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 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 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 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 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 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 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 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혜빈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 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7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효의왕후 김씨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 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스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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