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의 유래
|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
규장각의 발전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하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 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 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
정조의 업적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 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 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 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
혜빈 홍씨
|
'역사.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제24대 헌종 (0) | 2008.10.12 |
---|---|
조선왕조 제23대 순조 (0) | 2008.10.12 |
조선왕조 제21대 영조 (0) | 2008.10.01 |
조선왕조 제20대 경종 (0) | 2008.09.23 |
조선왕조 제19대 숙종 (0) | 200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