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왕위에 오른 배경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 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 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 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 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 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 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 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 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 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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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정책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 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 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 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 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 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 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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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실정
우선 왕 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 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 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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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 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 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 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 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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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 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 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 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 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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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호 사건
대동강 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의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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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 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 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 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 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 바 '손돌목 포격 사건 '으로 조. 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 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 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 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 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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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수교
신미양 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 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 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 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 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 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 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 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 일 수호협약 이 체결되면 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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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 군영에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 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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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발생
당시 일 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 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 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 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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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탄생
을미사 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 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 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 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 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 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 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 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 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 른다. 이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 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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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고종의 위기와 을사보호조약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 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 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 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 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 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 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 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 일 협약을 강요했 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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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 사사건
고 종은 일본이 설치한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 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 최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 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 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 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 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 으 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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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고종 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 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 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 되었을 뿐만 아 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 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 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 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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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귀인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 년 8월에 영왕에 봉해 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 월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 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 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 본 왕족 나 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 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 지 못했다. 일본 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 며 일본육군사관하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 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 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 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 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수권하던 심신장애자 재활 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 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일기로 세상 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 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자 교육시설인 명 혜학교 등을 설 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 재 생존해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 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의왕
고종의 셋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 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고 영왕 이은의 이복 형이다. 1877년에 태어 났으며 15 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 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귀 국하 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 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 오스트리아 등 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 에 의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 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 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 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 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 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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