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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노래에 얽힌 사연! - 故이난영

土譚 2009. 8. 19. 08:01

 

 

 

이  름----이난영 李蘭影
출생지----목포
본  명----이옥례
생년월일--916.6.6~1965. 4. 11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李南順)의 장녀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
이후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 문일석 작사인[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恨이)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65년 4월 11일에 세상을 등진 그녀는 4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여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다.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에서 태어남.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8월 태양극단 창극음반<춘향전전집>에 <흘러간 꿈>과 <시들은 청춘(靑春)> 녹음.
1933년 10월 오케이레코드사 전속가수로 <향수(鄕愁)><종로(鐘路)>취입 정식 데뷰.
1933년 11월 <불사조> <고적(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1월 신민요조의 노래 <신강남>과 <밤 언덕엘 넘어서> 발표.
1934년 2월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함.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 한국인 대표 출연.
1934년 <비오는 여름밤><녹스른 거문고>취입. 고복수와 함께 <젊은 뱃사공>발표.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5년 <어촌낙조(漁村落照)>, <봄 아가씨>등 발표, 고복수와 듀엣속<사랑의 노래> 취입
1936년 <아버지는 어디에>, <세월은 간다>, 김해송과 듀엣곡 <청춘해래(靑春海崍)>출반.
1936년 7월 오까 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이별의 뱃노래>, <아리랑의 노래> 등 데이지쿠레코드사(帝國畜音器會社) 취입.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을 발표하여 대히트를 기록.
1938년 김정구와 <연애삼색기(戀愛三色旗)>, 남인수와 듀엣으로 <흘러간 고향집>,
김해송과 <흘려본 가정 뉴스> 등 발표
1939년 <제3일요일>, <달 없는 항로>, <연락선 비가> 등 노래,
김해송의 본격적인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0년 2월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발표
1940년 7월 박시춘 곡 <선부(船夫)의 아내>,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0년 6?25전란 때 남편 김해송 납북.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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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의눈물 음반 표지                   

                       

             

                                

                                     이난영-목포의눈물                            

 

 

 

 

 

울분과 저항이 담긴 <목포의 눈물> - 이난영
글 : 이근태

 

'목포의 눈물' 가사지

엘레지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감추어진 노래로서 당싱 22세인 손목인의작곡으로 19세의 이난영이 노래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목포의 눈물 1절>

호남 곡창에서 나온 기름진 쌀과 풍요로운 목화는 목포항구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고 부모 남편 형제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 항구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의 항구는 눈물의 장소이며 눈물은 곧 항구였다.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2절>

한때는 일본경찰이 작가를 연행하여서 가사 내용이 불온한 냄새가 있다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삼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게된 저간의 사정 속에서 삼백년 원한을 삼백년 원안풍으로 말꼬리를 돌리고, 님자취는 이순신장군의 넋과 정신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으며 유달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가르키는 것이 작사가의 숨은 의도임을 이 노래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유달산 '노적봉'의 모습

노적봉은 유달산 입구에 있는 해발 60m 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의 전략으로 봉우리에 짚가리를 덮어서 왜군이 보기에는 산더미같은 군량미로 오인하여 후퇴하게 된 사정이 있다. 영산강에는 횟가루를 방류하여 마치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한 줄 안 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전하여 진다.

작사를 한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청년이었으며, OK레코드에서 현상모집한 "향토찬가 현상모집"에 '목포의 노래'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어 이것이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문일석은 26세에 요절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1972년 사망)의 1남 2녀중 장남이라는 것이 목포의 연로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난영, 박향림

태양극장의 막간가수 출신인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어머니는 극장주인 일본사람의 집에 일하러 제주도로 가고 없었다. 어머니가 그립기도 한 이난영은 목포 공립 보통학교(현 목포 북교 초등학교) 4학년때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게 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태양극장의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노래에 소질이 있는 이난영을 극장주인 일본사람이 소개하여 태양극장에 입단을 하였다. 태양극장은 1923년 박승희등이 설립한 토월회의 후신으로 토월회가 경영난으로 해산한 후 박승희 단독으로 1932년에 설립한 흥행위주의 연극단체였다.

태양극장의 연기인들은 토월회의 연기자들을 대부분 흡수하였는데 강석연, 양백명(탈렌트 양택조의 부친), 이동호, 석금성, 강석재등 당시 일류 배우들이 많았다.

이난영이란 이름은 태양극장의 박승희가 지어준것으로 1933년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서 처음으로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난영이란 예명으로 노래하였다.

"일본 교포의 초청으로 대판에 가서 '춘향전' 음반 12매로 취입할 때에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하여 ---"<사상계 1963.8 박승희 회고'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한 곡은 '지나간 옛꿈', '시드는 청춘'으로 1933년 8월에 태평레코드의 취입광고로 나와있다.

"16세때 세상물정을 아나요 대판에서 혼자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하며 --- 어느 흥행사에게 사기도 당했어요. 그때 OK레코드 사장 이철이 레코드 기획일로 대판에 왔어요.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나를 추천했어요"
<모던일본(마해송 주관):1940. 3 좌담회기사)

오케레코드사 스튜디오 모습

태양극장에서 배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해주며 고생하던 16세의 소녀 이난영은 이철에 의해 OK레코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OK레코드의 데뷔곡으로 1933년 9월 '향수', 10월에는 '고적', 그리고 '불사조'가 11월 신보 명칭으로 광고가 나오면서 (10월 20일부터 발매) 인기를 끌어 가수 이난영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4년 동요작가 윤석중의 가사로 된 '봄맞이'가 계속 힛트하고 1935년 8월에년 대표곡 '목포의 눈물'이 대힛트하여 고복수와 함께 OK레코드의 간판스타가수가 되었다.

유달산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취입하기 위해 노래 연습중이었는데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에 마땅한 곡이 없자 '갈매기의 항구' 음악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혀 '목포의 눈물'로 바꿔서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1936년대 이난영은 일본의 데이치구레코드에 7월 신보로 '이별의 뱃노래' '아리랑 노래'를 취입하였다. '이별의 뱃노래'는 '목포의 눈물'을 일본어로 번안한 가요이며 일본노래로 '바다의 고향', '석파의 노래' 등과 1938년에는 '백장미처녀'등 외 '봄마지'가 나왔는데 '봄마지'는 일본어로 번안 취입되었다.

1937년에는 '해조곡', 1939년에는 '다방의 푸른꿈'이 계속 힛트가 되었다. '다방의 푸른꿈'은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블루스 음악으로 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블루노트(BLUE NOTE)에 의한 작곡기법으로 구성되었다. <가요 평론가 황문평>

이난영, 이봉룡 남매

1942년에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가 힛트가 되면서 인기의 열정이 식지않고 계속되었다.

8.15 해방이 되자 남편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극단에서 뮤직컬쇼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을 손수 만들면서 악극단의 뒷바라지까지 하는 얌전한 여성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비극은 김해송의 납북으로 엘레지 여왕 이난영을 엘레지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7남매를 데리고 피난지 부산의 판자집에서 회초리를 들어 피나게 노래공부를 시켰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시스터와 김보이스가 이난영의 아들딸로서 미국흥행사에 의하여 1959년 김시스터스는 라스베가스에서 명성을 떨쳤었다.

김시스터즈

김시스터스는 숙자, 애자, 민자로 민자는 이난영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며 1970년에 귀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인기가수 이난영은 외로운 한송이 들국화 같은 여인으로서 항상 고독에 살아온 외로운 인생이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온 외로운 마음의 기둥인 남편 김해송과의 이별은 화려한 인기도 이난영의 마음을 메꾸지 못하였었다.

"이난영은 어릴때부터 얌전하고 눈물이 많았어요. 목포의 눈물이 나오기전이었지요. 극장 '단성사'에서 신무대의 공연시에 이난영이 특별출연하여 '봄맞이'와 '도라지타령'을 불렀어요. 너무 순진하고 화장도 못하여 내가 가르쳐 주었어요"<신카나리아 증언>

인기가수보다는 단란하게 살아가는 여인이 되고픈 소망이 염원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난영은 1965년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양주 한병이 딩굴고 있었는데 한잔의 술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눈을 감은 것이다. 장례식은 예총앞마당에서 연예협회주관으로 치루어졌다.

삼학도는 60년대 개발로 매립되어 산천은 변하고 사람도 가고 없지만 유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난영 기념비가 지나온 세월의 역사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목포의 눈물(1935년 OK레코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 노래비(유달산)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히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벽연 원안풍은 노적봉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다방의 푸른꿈(1939년 OK레코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흘러간 꿈을 찾을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2.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밤
목메어 부른다
그리운 그밤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소리 실은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뚫어진 그날밤
그대는 가고 나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흘겨본 과거몽(1940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1.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들창을 두들기는 낙엽은 추억이냐
정든땅 정든님을 천리밖에 내버리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왔던가

2.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천장에 섞여있는 연기는 꿈이려냐
정든 산천 정든 지붕 10년 넘어 밀쳐내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3.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거울에 사모치는 얼굴은 탄식이냐
정든길 정든하늘 타향길에 뿌리치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취입하기 위해 노래 연습중이었는데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에 마땅한 곡이 없자

'갈매기의 항구' 음악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혀 '목포의 눈물'로 바꿔서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노래가사와 그에 얼킨 사연

 

1. 사공의 뱃 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2절의 첫 대목은 유난히도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日本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원컨대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으로 .....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코드사에서는 황급히 歌詞紙(가사지)를 다시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나갔다

李蘭影은 이 노래의 전반적 歌唱(가창)을 통하여 역사의 유구함이라든가 민족사가 품고 있는 원한을 재생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별의 정조를 애타게 호소하는 듯한 여성적 한탄과 애교로 표현하였고, 맺고 끊는 分節의 분명 함을 나타내었다. 혼자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전통적 여성의 쓸쓸한 삶과 그 단호함에 대해서도 音色을 통해서 어떤 전달을 하고 있다. 2절의 셋째 행인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란 대목에서는 고향 木浦에서의 유년 시절과 그 추억을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정서로 환기시키려는 듯 밝고 활기찬 걸음걸이로 다음 小節(소절)에 연결해 간다.

 

흔히 대중가요라는 것이 몇 차례 거듭 들으면 곧 식상이 되는 경우가 일반이나 이 교수는「木浦의 눈물」은 연거푸 다섯 번까지 반복해서 들어도 그 고유하고 독특한 맛 이 줄곧 지속된다고 칭찬하고 있다. 어떤 대학교수는 ‘목포의 눈물’을 50번 연속 들었는데도 감회가 다 다르다고 술회하며 노랫말이나 사연을 알고 들으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칠맛이 난다고 했다. 이제까지는 「목포의 눈물」노래말을 지었던 이가 문일석이라고 전해졌었는데 사실은 윤재희다.

 

 윤재희(1916년생)는 원래 해남윤씨로 목포시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씨(1972년 목포에서 사망)의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목포북교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에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고, 당시 윤씨집안에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다른 작품을 더 쓰지 못하고 26세때(1942년) 작고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문일석이라는 필명만 알았지 본 이름이 윤재희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목포의 눈물」 가사 내용은 다분히 나라를 잃은 설움을 표현한 글로서 특히 2절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의 가사는 그때로부터 3백년전에 정유재란때 명량대전과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인이 그때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 내용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울밑에 봉선화'는 가곡으로써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시키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말이었다.

 

목포의 눈물이란

한낱 유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유행이 되었고 우리 민적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이고 선율이 되었던 것이다.

이난영은 1916년 여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李蘭影의 본명은 이玉禮(옥례), 한국적 정서가 풍기는 이름이다.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한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을 받은듯하다. 5.16 이후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가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손목인 선생 등의 노력으로 허가되었다. 이난영의 집이었던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도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이난영의 일생은 「목포의 눈물」이 히트곡이 되어서인지 자신의 인생에 눈물이 너무 많았다.

 

당년 49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예명 때문일까.... 나는 그림자 영[影]자를 이름으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影자는 실체가 없는 허께비지 않는가? 소설가 李無影도 그렇고....가수와 노래제목은 우연이긴 하겠지만 너무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 이난영과 남인수도 노래 말과 같이 되었고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 배호의 ‘마지막 잎새’, 양미란도 흑점을 부르고 골수에 흑점이 생긴 진단을 받아 세상을 떠났고 김정호도 ‘간다 간다 나는 간다’하더니 33세에 그냥 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이 이토록 구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향 목포, 본명 이옥례(李玉禮)로 작곡활동을 하고 있던 오빠 이봉룡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 소녀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故人이 되어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산 91-1 에 잠들어 있다

 

출처 :신안목포관광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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