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말자

[역사] 고려에 `고려장`은 없었다.

土譚 2014. 9. 24. 07:08

[역사는 평화와 미래를 위하여]

 

 

 

[영원한 맑은 세상을 위하여 -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고려장'은 없었다.

 

'고려장' 이란 말은 일제의 조작

 

고려 시대에는 '고려장'이란 풍습이 있어서 부모가 늘고 병들면 자식들이 지게에 엎고 갖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풍습인가?

과연 고려 시대에 이 고려장이 있었던가?
해답부터 얘기하자면 철저히 꾸며진 이야기 이다.

그것도 일제에 의해서 날조된 사실 이라는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옛날 자료 그 어디에도 없다.

고려시대까지 병자를 산속 깊이 내다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병자란 전염병 환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효죄를 반역죄와 더불어 매우 엄하게 처벌 하였다.

이런 사회에서 고려장이란 풍속이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 고려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고려장이란 말은 일제시대부터 쓰이기 시작 했는데

그 이유조차도 사악하기 그지없다.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든 이유란 즉 우리나라 문화재를 도굴하고자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이다.

전국을 뒤져 문화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반출하더니

급기야는 무덤의 부장품 (시신과 함께 묻은 물건들) 까지 노리게 되었다.

일본인이 조선인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가 힘들었다.

조선인 인부들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을 꺼려했는데

이는 한민족의 정서상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남의 무덤을 파헤친단 말인가?

예전부터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죄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인은 조선인의 경로효친 정신을 이용해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는데

"조선에는 고려시대부터 고려장이란 게 있었다.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못된 풍습이니 여기 묻힌 사람은 자기 부모를 생으로 고려장시킨 놈이므로 이 무덤은 파헤쳐도 괜찮다." 라는 말로

조선인 인부를 회유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친부모를 산채로 버리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일제의 얄팍한 상술에 이용되어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들어 내게되고

이런 용어가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는 우를 우리는 범하게 된 것이다.

하루 빨리 고쳐야할 대목이다.

 

 

'고려장'은 한국의 풍습이 아니다.

 

[펌]

 

고려시기 전공자라면 한번쯤 '고려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고려'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당연히 고려의 풍습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버리던 악습'이다.

또한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고 알려진 무덤들도 여러군데 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고려시기에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풍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과연 고려의 장례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는 고려장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이야기는 두 가지로 구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에서 낸 문제를 숨겨놓은 늙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해결하고 고려장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아비를 산 채로 져다버린 아버지가 내버린 지게를 아들이 후일 다시 쓰기 위해 가져옴으로써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불효를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전래된 이야기 이다.

 

앞의 이야기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뒤의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와 유사하다.

원곡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원곡이란 사람에게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원곡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여 갖다 버리려고 생각하였다.

15살 된 원곡은 울면서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드디어 수레를 만들어 갖다버렸다.

원곡이 따라가 수레를 다시 가져오니,

아버지가 "이처럼 흉한 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하였다.

원곡이 말하기를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다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깨달아,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왔다.

이후 잘 봉양하여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또한 '기로국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수용·확산되면서

불경에 있는 천신(天神)이 중국으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高麗葬)으로 변용되어

고려시기에 실재로 존재한 풍속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로국이야기는 몽고의 민담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고려장터로 알려진 무덤들은 무엇일까.

고고학계의 발굴결과로는 고려장과는 무관한 석관묘(石棺墓)나 석실분(石室墳)으로 판명됐다.
이와 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속이 아니었다.

고려시기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 하였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80살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기 위해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기로국이야기를

마치 우리 나라, 특히 고려의 실제 풍습인 양 바꾸어 전승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이우석(부천대 강사, 중세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