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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주년 맞은 사물놀이의 대부, 김덕수

土譚 2007. 1. 17. 09:56

데뷔 50주년 맞은 사물놀이의 대부, 김덕수

 

 

 

김. 덕. 수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사물놀이의 거장, 한 해에 국내외를 통틀어 무려 150회 이상의 공연을 갖는 그의 나이는 올해로 쉰여섯.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만나고 싶었다. 무엇이 그를 반세기라는 시간동안 국악을 사랑하게 했는지, 그는 어떤 청춘을 보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김덕수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혀있는 공연은 기자를 한 달이나 기다리게 했다. 기자는 한 달 동안 그의 음반을 듣고, 동영상을 보고, 미니홈피에 가서 수많은 사진들을 봤다. 그리고 ‘신명’을 만났다.


Part 1. 신촌 그리고 김덕수


김덕수는 주로 공연에서 장구를 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왼손잡이’이다. 왼손잡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편견을 품고 ‘왜 왼손잡이인가’를 질문 한 기자에게 돌아온 답은 아주 간단명료하게도 선생님이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이라는 것. 김덕수는 선생님을 마주 보고 장구를 배웠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됐다. 보이는 그대로를 따라할 나이, 그는 만 다섯 살에 장구를 시작했다.


그가 영화 ‘왕의 남자’의 감우성, 이준기가 연기했던 ‘남사당패’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 기자는 그 ‘다음’이 궁금했다.


젊은 시절, 그의 연습실은 ‘신촌’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촌이 젊은 문화의 상징이라는 생각을 할 찰나. 그 시작에 김덕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오늘날 신촌 최고의 축제로 자리 잡은 ‘신촌 거리 축제’를 기획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건 재밌는 발견이었다.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기자는 김덕수의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

 

 

 

김덕수는 지금까지의 음악 인생에 있어 ‘신촌 연습실’에서의 하루하루가 가장 신났다고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악기를 치는 지금도 신명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시절엔 하루하루가 하고 싶었던 것들의 시작점이었기에 유난히 행복했다는 이야기.


연습실 꼭대기 층에 무허가로 숙소를 지었다가 구청직원들과 실랑이를 반복한 일, 기독교 학교에서 축제 기간 굿판을 벌였다가 학교 항의를 받았던 일, 지금은 없어졌지만 너무나 인심 좋았던 기차역 앞 신촌 갈비집에서의 그 시절.


김덕수에게 있어 신촌은 진정 ‘걷고 싶은 거리’이다. 당신의 젊은 낭만을 묻었기에.


Part 2. 한류와 김덕수


“김덕수 선생님은 사물놀이의 대부예요. 인터뷰 전에 목욕재계하고 가셔야 합니다.”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만났던 김덕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사물놀이의 대부.


맞는 말이었다. 김덕수는 정말 많은 이들로부터 선생님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김덕수의 제자 중에서도 악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많으니 선생님도 그냥 선생님이 아니라 증조, 고조 선생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덕수가 직접 가르치고 이끌고 있는 팀만 해도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 ‘한울림 가무악단’, ‘새울림 청소년예술단’, ‘전통 연희단’이 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는 전통연희에 대한 강의도 맡고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외국인이 부르는 ‘스승 김덕수’이다. 김덕수의 지휘 아래 김덕수와 김덕수의 제자들은 해마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해외 유수대학에서 우리 악기를 가르친다. 우리 악기를 배우는 학생들의 반응은 단연, 원더풀!


사실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올림픽, 월드컵, 심지어 UN사무총장 취임식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축하공연을 하는 것으로도 이미 사물놀이를 해외에 성공적으로 알렸다는 평을 받았지만, 김덕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소리를 세계로 뿌리내리려는 작업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공연을 하는 입장에서 악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공연은 저녁에 있는 반면, 악기 강의는 오전에 있기 때문에 전날 공연이 늦게 끝나도 새벽같이 일어나 강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수가 사물놀이 강의를 공연만큼이나 중요시하는 이유는 전 세계에 우리 사물놀이가 보급되면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우리 악기에 대한 수요 때문이다. 늘어나는 수요에 따라 악기가 보급되면 세계 곳곳에서 우리 가락으로 된 공연이 폭 넓게 기획될 수 있고 한국음악은 더 이상 한국의 것이 아닌 세계의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김덕수식’ 한류다.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케, 미국의 뮤지컬. 세계 어느 전통을 보더라도 우리의 국악처럼 오래 공연되어 온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합니다.”


한류. 그것이 진정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여기 김덕수가 말하는 오래된 역사와 신명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런지.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이젠 우리 차례라고 말하는 김덕수의 행보가 기대된다.


Part 3. 사물놀이와 힙합


Crossover.

요즘 국악에서 유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크로스오버’이다. 크로스오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장르가 조화를 이뤄 하나의 음악을 연주한다. 그래서인지 크로스오버엔 묘한 매력이 있다. 요즘 들어 이슬기나 숙명가야금연주단 등 젊은 국악인들이 크로스오버로 주목 받고 있지만 김덕수에게 크로스오버란 이미 오래전부터 시도해온 또 하나의 음악장르일 뿐이다.


지난 1987년부터 협연한 오스트레일리아 재즈밴드 레드 선과의 크로스오버가 대표적이고 국내외 수많은 관현악단과의 협연은 이젠 공중파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이 바로 사물놀이와 힙합과의 만남이다.

 

 

 

뭐가 문제였을까? 기자는 사물놀이와 힙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이 두 장르의 크로스오버가 기대됐다. 그렇게 해서 본 것이 지난해 10월 충무아트홀에서 열렸던 사물놀이&레드 선 공연. 이 공연에서 김덕수는 레드 선과 협연 외에 힙합 그룹 스퀘어와도 호흡했다.


그리고 ‘문제의’ 크로스오버 공연을 본 소감은 한 마디로 자연스럽다였다. 김덕수는 힙합과의 크로스오버에 대해 우리전통과 흑인전통의 만남일 뿐이라며 겸손해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이 부당한 이유는 김덕수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물놀이와 힙합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덕수는 ‘힙합’을 좋아할까? 정답은 YES이다.

김덕수는 ‘힙합’을 젊은이들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힙합은 음악의 한 장르였다. 따라서 음악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듣는 것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의 아들이 힙합퍼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 재밌는 것은 이 힙합퍼는 사물놀이를 들으며 잉태됐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떠나 뮤지션으로서 이 교류가 즐겁다는 김덕수.


사실 여느 부모님 같으면 아들이 ‘힙합’을 한다는 데 그리 달갑지 만은 않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흐믓하다고 답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음악의 해방을 엿볼 수 있었다.


Part 4.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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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려워진다. 사람마다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이 가야 할 에 대해 모두가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 위에서라니, 이 대목에서 해결사로 나선 김덕수에게 있어 이란 무엇일까?


바로 ‘굿판’이었다. 길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굿판 말이다.


사람들은 김덕수가 사물놀이를 한다고 해서 제일 먼저 앉아서 연주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김덕수는 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은 앉아서도 벌일 수 있지만, 일어서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큰 판을 벌일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김덕수는 자체공연 내지는 어느 정도 판을 벌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면 무대가 아닌 관객이 입장하는 공연장 입구에서 등장한다. 그리고선 언제나 문엽쇼 문엽쇼 수문장 문엽쇼라고 시작하는 문굿을 한다.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무대까지 사람들이 다니는 을 따라 악기를 치며 관객들과 나란히 인사를 나눈다.


특히 지난해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나라음악큰잔치’ 동영상은 기자에게 김덕수가 말하는 ‘길’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는데, 바로 몽고 테릴지 국립공원 고흐힝 앙 바롱 살라의 넓은 초원을 가로지른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연주가 보고 있는 동안 참 여러 감정을 교차하게 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은 악기를 치며 나아가는 동안 부드러운 흙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몽고와 우리가 한 민족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리 내는 듯 했다. 김덕수의 말대로 길 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김덕수는 얼마 전 이 길 위의 것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그리고 지난 오십년 동안 악기를 치며 보고 듣고 느꼈던 수많은 것들을 담아내고자 음반녹음 작업을 마친 상태이다. 음반의 제목은 바로 김덕수가 말하고자 했던 길 위에서. 오십 년 예술인생을 담아내려면 정말 심혈을 기울였겠노라고 이번 음반을 준비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냐는 기자의 질문에 녹음은 단 사일 만에 끝났습니다. 음반작업이야말로 일반 공연과 달리 대중과 소리로만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녹음시간보다는 그 어느 때보다 신명나게 작업하려는 데 신경 썼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그.


김덕수는 지금 참 여러 길을 가고 있다. 국악인, 스승, CEO, 예술감독, 아버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느 하나 조금의 여유도 부릴 수 없는, 김덕수 개인에게 그리고 우리 국악에 있어서 참으로 괄목할 만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김덕수는 연주를 다니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연을 기획한다. 국악 인생 오십년, 한 개인에게 있어 사춘기를 겪고 청춘을 논하며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 아이와 가족을 꾸리는,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역량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도전과 열정, 고민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기나긴 세월이기에 이 오랜 시간을 ‘국악’과 함께 해 온 당신의 길이 참으로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 위에서의 당신의 신명이 즐겁다. 길 위에서, 김덕수는 사람들에게 바람이고 나무였다. 이제 혹시 길 위에서 김덕수를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해보자. 덩 덩 덩 더러러러 덩 기덕 쿵 덕.



글 : 문화관광부 대학생 기자단 이예진

사진 : 문화관광부 대학생 기자단 임성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