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속으로

굴비의 고장 법성포를 찾아서..

土譚 2007. 2. 7. 21:03
굴비의 고장 법성포를 찿아서..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리에 있는 포구(浦口). 군의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에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에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법성창(法聖倉)을 설치하여 조운(遭運)에 이용하였다. 조선 중종 때에 나주의 영산창(榮山倉)은 수로가 험하여 배가 전복되는 등 손실이 많다고 하여 법성포에 창고를 짓고 영산창에서 맡아 거두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거두게 하였다.
따라서, 법성창은 주변 12개 지역의 전세와 대동미를 거두어 서울로 운송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물자의 드나듦에 대하여는 법성첨사(法聖僉使)가 있어 계량(計量)을 감독하였다. 현재는 토사가 쌓여 항구로서의 기능은 많이 쇠퇴하였으나 조기의 어획으로 인한 어항으로서의 기능은 아직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영광군의 정기시장이 법성포가 있던 지역에서 개시되므로 주변지역에 대하여 시장중심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행정상으로 법성포는 조선시대에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고종 때에 전국을 13개도로 분리할 때 전라남도 영광군 진량면에 속하였다가 현재는 법성면에 속하여 있다.
 
 
 
남녁의 겨울바다가 몹시 그리웠다. 그래서 한달음에 찾은 곳. 법성포
 
법성포구의 안온함이 감도는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겨울바다가 어디에 있을까? 법성포엔 바다도 겨울도 없었습니다.


 
마치 고향마을의 강변을 걷듯 법성포 바다곁을 걸었다.
 
이 깊고 너른 뻘이 없었다면 법성포가 포구란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법성포엔 갯벌이 바다였다.
 
법성포는 그 어디나 속을 비운채 좋은 햇살에 말려지는 물고기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법성포에 내린 햇살도 갯벌도 갈대도 모두 굴비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빛났다.

 
 
법성포의 주인공은 바다와 갯벌만이 아니다.
더 넓은 갈대밭이 법성포를 찾은 이들을 기다린다.
 
시커먼 갯벌과 어깨를 나란히 한 붉은 황토 채마밭. 고슬한 흙의 느낌이 포근했다.
 
집집마다 가득했던 젓갈통.
담장 옆이든 마당안이든 작고 큰 젓갈통들이 옹기종기 정겨운 모습이었다.
 
굴비들의 행렬이 법성포임을 말하듯, 법성포엔 굴비의 은빛 비늘이 지천이었다.
 
어디메쯤 푸른 물결 일렁이는 바다가 있을까?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이 또 바다를 꿈꾸게 했다.
 

 
바닷물과 민물을 가르는 수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저긴 강이야! 바다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