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속으로

[스크랩] 영주 부석사

土譚 2008. 9. 4. 21:58

8월 31일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무량수전, 무량수전 앞 석등 등의 국보와 3층석탑,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외 문화재가 가장 많은 사찰이기도 하다.

 

부석사는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로 유명하다.

 

의상대사(625~702)는 신라 왕족의 신분으로 20세 때 불문에 귀의하여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무덤 속에서 해골물을 마신 원효는 깨달은 바 있어 귀국했지만 의상은 바다를 건너 등주(봉래)에 도달하였다. 의상은 한 신도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가까이하려고 했지만 의상은 ‘이미 속세를 떠난 몸이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의상은 장안 종남산에서 지엄(智儼)스님으로부터 10년간 화엄경을 배우고 귀국길에 등주에 다시 들렀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는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법복과 생활집기를 들고 뒤쫓아 갔으나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선묘는 ‘내 몸이 변해서 대룡(大龍)이 되기를 비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땅에 닿아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하고 몸을 바다에 던졌다. 용으로 화한 선묘는 황해만리길을 의상을 호위하며 무사히 신라땅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왔다.

 

왕명으로 의상이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 할 때 거기에 웅거해 있던 무리들이 방해했다. 이때 선묘는 큰바위로 변하여 가람의 지붕위에서 떨어질까, 말까하는 모양을 하자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에 의상은 절에 들어가 화엄도량으로 크게 일으켰으며 선묘는 석룡(石龍)이 되었는데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 머리부분이 시작하여 석등아래 꼬리부분이 묻혀있다’고 한다.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의상 대사를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영원히 깃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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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부석사(浮石寺) 안양루(安養樓)의 김 삿갓 시(詩) -

 

浮石寺(부석사)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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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서 있는 3층 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 130호)

 

통일신라 후기 3층석탑으로 쌍탑이다.

2층 기단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윗 부분은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져 있는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양 탑 모두 원 위치가 아니라 부석사 동쪽 200M지점에 있는 무명사지에서

1966년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출처 : 영주 부석사
글쓴이 : 土譚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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