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주이씨 시중공파

土譚 2012. 1. 7. 10:24

侍中公 실록약사

고려문하시중 시숙헌성주이공지비(高麗門下侍中 諡肅憲星州李公之碑)

시중공(휘 만년)---제단비

시중공파항렬표

주해(註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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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侍中公 실록약사

    시중공 진영

군(府君)의 휘(諱)는 만년(萬年)이니 농서군공(西郡公)의 셋째아드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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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忠烈王)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을 두루 역임하시고 마침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관직에 있어 정사(政事)의 훌륭한 행적과 후세에 끼친 덕화(德化)는 마땅히 돈후(惇厚)한 사실의 기록에 실려있고 사람의 입에 전파되었을 것인데 세대(世代)가 오래되고 난리를 거듭격는 동안 모두 없어졌으니 마침 하은(夏殷: 중국 고대의 나라 이름)의 예도(禮度)를 杞宋(중국고대의 나라이름)의 문헌(文獻)으로 족히 징거하지 못함과 같은지라 후손된 사람으로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일찍 외사(外史:미간에서 사사로 기록한 역사 책)를 상고하여 보니 공(公)께서 돈후(惇厚)한 예(禮)가 있어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法度)를 지키어 화락함을 이루었고조정에 나가 정사를 펴는데는 법을 삼가 지키셨다 하였다. 이렇듯 후세에 모범을 보여셨으니 자그마한 깃털로서 가히 오채(五采)의 아름다움을 짐작함과 같도다. 어찌 많은 기록이 필요 있겠는가. 옛적에 공의 영정(影幀)을  안산사(安山祠)에 모시고 농서군공의 오른쪽에 신위(神位)를 모시어 배향(配享)하였는데 중간에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사우(祠宇)가 불탐으로 인하여 존영도 보전하지 못했으니 자손의 쌓인 한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도다.

부인(夫人)은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재신(宰臣) 현(賢)의 따님이시다.

아아! 대저 천지에 영구히 그치지 아니함은 오직 명망과 덕화인데 덕의 아름다운 향기는 여음(餘蔭)으로 계속 혁혁하여 이름난 공경(公卿)의 높은 벼슬과 고을의 관장(官長)이며 충신(忠臣)과 현인(賢人)이 공의 후손에서 대대로 이었으니 하늘에서 적선(積善)을 보답함이 실로 더함없이 아름답도다.

공의 유지(遺址)가 관향(貫鄕)인 성주읍(星州邑) 영봉산(迎鳳山) 아래 있어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지라 두려운 마음을 이길 수 없도다. 이에 감히 참람함을 잊고 전말(顚末)을 간략히 기록하는 바이다.

                 후손 조혁 삼가씀

 

 고려문하시중 시숙헌성주이공지비(高麗門下侍中 諡肅憲星州李公之碑)

 시중공제단비.jpg

  증 고려문하시중 추봉 삼중대광도첨의정승전리사상호군성산부원군 행 견용랑장겸중군기후 시숙헌호창고성주이공휘만년단비명병서 (贈 高麗門下侍中 追封 三中大匡都僉議政丞典理司上護軍星山府院君 行 牽龍郞將兼中軍祇候 諡肅憲號蒼고星州李公諱萬年壇碑名幷序 )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가문에는 족보와 유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세계어느나라보다도 으뜸가는 나라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인류사회에서 예절을 신중히 한다는 것은 가정에는 효요 나라에는 충이요 사회에는 선의인 것으로서 인간본연의 숭고한 자세를 갖춤이라 하겠다. 여기 성주이씨 문중애서는 나라계통을 바로 세우는 충절에 헌신하신 바 그에 미친영향으로 인해 조상의 묘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제단을 마련하고 봉사손 상조가 비문을 청해왔다. 저는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유를 기록한다.

공(公)의 세계(世系)는 사기(史記)에 확인된 바 신라재상 성주이공 휘(新羅宰相 星州李公 諱)에 순(純)자 유(由)자로 위시조(爲始祖)하시고 이하 십이세(十二世)에 이르러 휘(諱)에 장(長)자 경(庚)자는 고려 고종때 성주에서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벽상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도첨의정승지전이사사상호군 경산부원군에 추봉(壁上三中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都僉議政丞知典理司事上護軍 京山府院君에 追封)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 손(孫)인 승경의 추작(丞慶의 追爵)으로 인해 공(公)에게도 농서군공을 선칙(宣勅)하여 추봉(追封)되시었다. 슬하(膝下)에 오형제를 두시어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니 첫째는 밀직사사정절공(密直司事貞節公 휘(諱)에 백(百)자 년(年)자요 둘째는 참지정사추봉 농서군공(參知政事追封 농西郡公) 휘(諱)에 천(千)자 년(年)자요 셋째는 문하시중숙헌공(門下侍中肅憲公) 휘(諱) 만(萬)자 년(年)자요 넷째는 개성유수(開城留守) 낙산제공(樂山齋公) 휘(諱) 억(億)자년(年)자요 다섯째는 정당문학문열공(政堂文學文烈公 휘(諱)에 조(兆)자 년(年)자이시다.

고려원종4년(서기1263년)성주용산리에서 탄생하신 시중공(侍中公) 휘(諱)에 만(萬)자 년(年)자께서는 자는 여진(汝眞)이요 호(號)는 창고(蒼皐)이시다. 충열왕11년(서기1248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견용(牽龍)과 낭장겸중군기후(朗將兼中軍祇候)를 역임(歷任)하시고 증직(贈職)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내려졌으며 삼중대광도첨의정승전리사상호군성산부원군(三中大匡都僉議政丞典理司上護軍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시호(諡號)는 숙헌(肅憲)이시다. 족보를 살펴보면 공(公)의 장자(長子)인 의인(宣仁)은 문과(文科)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시고 묘(墓)는 장손(長孫)인 이조판서득봉(吏曹判書得逢)과 함께 성주에 모셔있고 증손(曾孫)인 도분(道芬)은 국총(國摠)을 사분(思芬)은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歷任)하시고 시호(諡號)는 호간(胡簡)이시며 다음은 승분(勝芬)이시다. 현손(玄孫)인 춘영(春英)은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에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내시고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신데 묘(墓)는 고위(考位)와 함께 충주에 모셔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公)의 차자(次子)인 태수(台秀)는 랑장(郞將)을 역임하셨고 손(孫)인 대분(大芬)은 부금(副今)을 역임하셨으며 다음은 원봉(元鳳)이시다. 증손(曾孫)인 성(晟)은 소감(小監)을 장(奬)은 목사(牧使)를 각각 역임하시고 현손(玄孫)인 유인(有仁)은 판관(判官)을 다음 승유(承幼) 그다음 재유(在幼)는 현감(縣監)을 역임하셨다. 경산지에 따르면 공(公)의 제삼자(第三子)인 태보(台寶)는 대령금주판관봉의대부정동행중서성좌삼중대광도좌사사(大寧錦州判官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三中大匡都左司事)로 성산군(星山君)에 봉(封)하셨고 손인 득분(孫인 得芬)은 좌명공신대광보국예조판서 예문관직제학상호군(左命功臣大匡輔國禮曹判書 禮文館直提學上護軍)을 지내셨으며 증손(曾孫)인 비()는 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禮文館大提學吏曹判書)를 역임(歷任) 성주군월항면장교촌에에서 대대로 지내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징험(徵驗)해 볼 때 공(公)의 현손(玄孫)인 지활 이조판서(智活 吏曹判書)께서는 1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8세에 운봉현감(雲奉縣監)으로 임명되어 부임한지 5년만에 단종애사(端宗愛事)가 발발(勃發)하니 박유산(朴儒山)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순절(殉節)로 충의(忠義)를 다하셨고 지원 이조참판(智源吏曹參判)께서는 형의 뜻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연봉산(延鳳山)에 은둔(隱遁)하여 여생을 마치셨다.두분 께서는 월항면 장기촌에서 출생하셨으나 후 일 고향으로 돌아 오시지 못하셨다.제사자(第四子)인 태무(台茂)는 판서(判書)를 역임하시고 손(孫)인 치생(稚生)은 소부윤선주사(小府尹善州事)를 각각역임하셨으며 증손(曾孫)은 유지(有智)요 다음 존례(存禮)는 통판주사(通判州事)를 역임하셨다. 현손(玄孫)은  맹강(孟剛) 맹곡(孟穀) 전충(全忠)이다.

한편 장증손(長曾孫)이후의 유적(遺蹟)은 충주(忠州)에 또 공(公)의 현손(玄孫)인 지활이후(智活以後)의 유적은 거창에 각각멀리  외지에 있는 것을 보면 전하는 바와 같이 충절(忠節)은 다하시고 선조의 유적은 보전하지 못한한 것이 통한의 슬픔이라 하겠다. 생사육신(生死六臣)과 함께 당시정국(當時政局)의 경직(梗直)된 상황들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에 지금의 후손들은 공(公)의 선고농서군공(先考西郡公)의 선산하(先山下)인 금산리산911번지에 등단(登壇)을 마련하고 아울러 그동안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단비(壇碑)를 병건(竝建)하여 매년 정일(定日)에 분향헌제(焚香獻祭)코자 하는 바 이 명(銘)을 바치나니 무릇 혈기(血氣)와 정력(精力)은 유한(有限)하고 덕업(德業)과 사공(事功)은 무한(無限)한 것이다.

고려의 융성한 업적은 빛나고 삼엄(森嚴)한데 종문(宗門)의 번영은 면면(綿綿)하고 경사롭다. 시중공슬하(侍中公膝下)에 대제학(大提學)나셨으니 장지촌 명칭(長枝村 名稱)마져 판서(判書)골로 바끼었네. 조상의 유풍따라 숙헌공 교훈(肅憲公 敎訓)받아 자손들의 충절단심(忠節丹心 박유산(朴儒山)에 메아리 치네. 나라위해 바친 자손 종묘유적(宗廟遺蹟) 비울 줄이야. 오백년궐사(五百年闕祀)하니 후손들의 득죄(得罪)로 오늘에야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향주과(香酒果) 드리나니 간절한 정성(精誠)이라 관용(寬容)하여 주시옵고 흔쾌(欣快)이 감응(感應)하시어 무량수성(無量壽星) 비옵나이다

           1995년 乙亥 秋

                                                                           文學博士    鄭 喆 洙  謹識(근식)

                                                                            二十二世孫    奉 昊  饉書(근서)

  

시중공(휘 만년)---제단비(상복 종친님 자료)

 

유적명

시중공 휘 만년(侍中公 諱 萬年) 제단(祭壇) 및 제단비(祭壇碑)

위치

경북 성주군 대가면 금산리(오현재옆)

설립년도

1995년11월

제단(祭壇)

시중공 휘 만년(侍中公 諱 萬年),배 군부인 의성김씨(配 君夫人 義城金氏)

고려 문하시중 시 숙헌 성주이공 지 비문(高麗 文下侍中 諡 肅憲 星州李公 之 碑文)

 증 고려문하시중 추봉 삼중대광도첨의정승전리사상호군성산부원군 행 견용랑장겸중군기후
시숙헌호창고성주이공휘만년단비명병서
(贈 高麗門下侍中 追封 三中大匡都僉議政丞典理司上護軍星山府院君行牽龍郞將兼中軍祇候
諡 肅憲號蒼皐星州李公諱萬年壇碑名幷序 )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가문에는 족보와 유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으뜸가는 나라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인류사회에서 예절을 신중히
한다는 것은 가정에는 효(效)요 나라에는 충(忠)이요 사회에는 선의 인 것으로서 인간 본연의
숭고한 자세를 갖춤이라 하겠다.
여기 성주이씨 문중에서는 나라 계통을 바로 세우는 충절에 헌신하신 바 그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조상의 묘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제단을 마련하고 봉사손 상조가 비문을 청해왔다

저는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유를 기록한다.

공(公)의 세계(世系)는 사기(史記)에 확인된 바 신라재상 성주이공 휘(新羅宰相 星州李公)
휘(諱) 순(純)자 유(由)자로 위시조(爲始祖)하시고 이하 십이세(十二世)에 이르러
휘(諱)에 장(長)자 경(庚)자는 고려 고종때 성주에서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벽상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도첨의정승지전이사사상호군경산부원군에추봉(壁上三中大匡 左侍中興安府院君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上護軍京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 손(孫)인 승경의 추작
(丞慶의 追爵)으로 인해 공(公)에게도 농서군공을 선칙(宣勅)하여 추봉(追封)되시었다.
슬하(膝下)에 오형제를 두시어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니
첫째는 밀직사사정절공(密直司事貞節公 휘(諱)에 백(百)자 년(年)자요
둘째는 참지정사추봉 농서군공(參知政事追封
?西郡公) 휘(諱)에 천(千)자 년(年)자요
셋째는 문하시중숙헌공(門下侍中肅憲公) 휘(諱) 만(萬)자 년(年)자요
넷째는 개성유수(開城留守) 낙산제공(樂山齋公) 휘(諱) 억(億)자년(年)자요
다섯째는 정당문학문열공(政堂文學文烈公 휘(諱)에 조(兆)자 년(年)자이시다.

고려원종4년(서기1263년)성주 용산리에서 탄생하신 시중공(侍中公) 휘(諱)에 만(萬)자 년(年)자
께서는 자는 여진(汝眞)이요 호(號)는 창고(蒼皐)이시다.
충열왕11년(서기1248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견용(牽龍)과 낭장겸중군기후(朗將兼中軍祇候)를
역임(歷任)하시고 증직(贈職)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내려졌으며 삼중대광도첨의정승전리사상호군
성산부원군(三中大匡都僉議政丞典理司上護軍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시호(諡號)는
숙헌(肅憲)이시다.
족보를 살펴보면 공(公)의 장자(長子)인 의인(宣仁)은 문과(文科)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시고
묘(墓)는 장손(長孫)인 이조판서득봉(吏曹判書得逢)과 함께 성주에 모셔있고 증손(曾孫)인
도분(道芬)은 국총(國摠)을 사분(思芬)은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개성유수
(開城留守)를 역임(歷任)하시고 시호(諡號)는 호간(胡簡)이시며 다음은 승분(勝芬)이시다.
현손(玄孫)인 춘영(春英)은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에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내시고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신데 묘(墓)는 고위(考位)와 함께 충주에 모셔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公)의 차자(次子)인 태수(台秀)는 랑장(郞將)을 역임하셨고 손(孫)인 대분(大芬)은 부금(副今)을
역임하셨으며 다음은 원봉(元鳳)이시다.
증손(曾孫)인 성(晟)은 소감(小監)을 장(奬)은 목사(牧使)를 각각 역임하시고 현손(玄孫)인
유인(有仁)은 판관(判官)을 다음 승유(承幼) 그다음 재유(在幼)는 현감(縣監)을 역임하셨다.
경산지에 따르면 공(公)의 제삼자(第三子)인 태보(台寶)는 대령금주판관봉의대부정동행중서성
좌삼중대광도좌사사(大寧錦州判官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三中大匡都左司事)로 성산군(星山君)에
봉(封)하셨고 손(孫)인 득방(得芳)은 좌명공신대광보국예조판서 예문관직제학상호군
(左命功臣大匡輔國禮曹判書 禮文館直提學上護軍)을 지내셨으며 증손(曾孫)인 비(?)는 예문관
대제학이조판서(禮文館大提學吏曹判書)를 역임(歷任) 성주군 월항면 장교촌에에서 대대로
지내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징험(徵驗)해 볼 때 공(公)의 현손(玄孫)인 지활 이조판서(智活 吏曹判書)께서는 1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8세에 운봉현감(雲奉縣監)으로 임명되어 부임한지 5년만에 단종애사
(端宗愛事)가 발발(勃發)하니 박유산(朴儒山)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순절(殉節)로 충의(忠義)를
다하셨고 지원 이조참판(智源吏曹參判)께서는 형의 뜻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연봉산(延鳳山)에
은둔(隱遁)하여 여생을 마치셨다.두분 께서는 월항면 장기촌에서 출생하셨으나 후 일 고향으로
돌아 오시지 못하셨다.
제사자(第四子)인 태무(台茂)는 판서(判書)를 역임하시고 손(孫)인 치생(稚生)은 소부윤선주사
(小府尹善州事)를 각각역임하셨으며 증손(曾孫)은 유지(有智)요 다음 존례(存禮)는 통판주사
(通判州事)를 역임하셨다. 현손(玄孫)은  맹강(孟剛) 맹곡(孟穀) 전충(全忠)이다.

한편 장증손(長曾孫)이후의 유적(遺蹟)은 충주(忠州)에 또 공(公)의 현손(玄孫)인 지활 이후
(智活 以後)의 유적은 거창에 각각 멀리  외지에 있는 것을 보면 전하는 바와 같이 충절(忠節)은
다하시고 선조의 유적은 보전하지 못한한 것이 통한의 슬픔이라 하겠다.
생사육신(生死六臣)과 함께 당시정국(當時政局)의 경직(梗直)된 상황들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에 지금의 후손들은 공(公)의 선고농서군공(先考?西郡公)의 선산하(先山下)인 금산리산911번지에
등단(登壇)을 마련하고 아울러 그동안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단비(壇碑)를 병건(竝建)하여
매년 정일(定日)에 분향헌제(焚香獻祭)코자 하는 바 이 명(銘)을 바치나니 무릇 혈기(血氣)와
정력(精力)은 유한(有限)하고 덕업(德業)과 사공(事功)은 무한(無限)한 것이다.

고려의 융성한 업적은 빛나고 삼엄(森嚴)한데 종문(宗門)의 번영은 면면(綿綿)하고 경사롭다.
시중공슬하(侍中公膝下)에 대제학(大提學)나셨으니 장지촌 명칭(長枝村 名稱)마져 판서(判書)골로
바뀌었네. 조상의 유풍따라 숙헌공 교훈(肅憲公 敎訓)받아 자손들의 충절단심(忠節丹心)
박유산(朴儒山)에 메아리 치네. 나라위해 바친 자손 종묘유적(宗廟遺蹟) 비울 줄이야.
오백년궐사(五百年闕祀)하니 후손들의 득죄(得罪)로 오늘에야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향주과(香酒果)
드리나니 간절한 정성(精誠)이라 관용(寬容)하여 주시옵고 흔쾌(欣快)이 감응(感應)하시어
무량수성(無量壽星) 비옵나이다

           1995년 乙亥 秋                     
  文學博士    鄭 喆 洙  謹識(근식)

   二十二世孫    奉 昊  饉書(근서)

  시중공파항렬표

    -20세: ○용(○容),○화(○火)
    -21세; 교○(敎○),토○(土○)
    -22세: 종○(鍾○),금○(金○)
    -23세: ○순(○淳),○수(○洙)
    -24세: 상○(相○),병○(秉○)
    -25세: ○희(○熙),○섭(○燮)
    -26세: 재○(在○),규○(圭○)
    -27세: ○현(○鉉),○석(○錫)
    -28세: 택○(澤○),영○(永○)
    -29세: ○식(○植),○근(根○)
    -30세: 병○(炳○),현○(炫○)
    -31세: ○기(○基),○배(○配)
    -32세: 옥○(鈺○),용○(鎔○)
    -33세: ○홍(○洪),○락(○洛)
    -34세: 병○(柄○),계○(桂○)
    -35세: ○형(○炯),○렬(○烈)

 

 

 주해(註解)

① 휘(諱): 돌아가신 분의 이름.

② 경상(卿相): 재상(宰相), 육경(六卿)과 삼상(三相).

③ 삼중대광(三重大匡): 고려때 정일품의 문관의 계급.

④ 좌명공신(佐命功臣): 태종원년에 박포(朴苞)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이저(李佇)의 무리에게 상준 훈명.

⑤ 단종을해년(端宗乙亥年): 서기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나이어린 단종을 폐위시켜 영월로 유배한 정변(단종애사 참조).

⑥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앞에 세운 붉은 집.

⑦ 사과(司果): 오위(五衛)의 정육품의 군직무관(軍職武官).

⑧ 만호(萬戶): 종(從) 사품(四品) 무관(無官).

⑨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

⑩ 비: 돌아가신 어머니

⑪ 영천(靈川)의 관동(館洞): 고령군 고령읍에 있는 마을 이름.

⑫ 문목공(文穆公): 한강정술(寒岡鄭述)의 시호.

⑬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

⑭ 열복(悅服): 마음에 기뻐서 복종하는 것.

⑮ 만사(挽詞): 죽은 사람을 슬퍼하며 지은 글.

16. 가장(家狀)집안 선대 어른의 행적에 관한 사사 기록

17. 행장(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을 지낸 일을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