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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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830m에 축조된 거룡관산성의 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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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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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2시간여를 가면 명 13릉과 팔달령(八達嶺) 사이에 '날아다니는 새도 통과할 수 없다'는 해발 830m의 험준한 산에 성을 쌓은 만리장성의 거룡관(居庸關)산성이 나온다.
이 거대한 산성은 무려 6350㎞나 이어져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공사에 동원돼 죽어 갔을까.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하는 생각을 하자 아찔하다. 사람들의 피멍든 마음에 물들어서인지 성은 온통 피멍든 검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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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산성을 오르는 70대 노인들의 모습도 흔한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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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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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 초입에는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모택동의 휘호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엔 15위엔(1950원)을 내면 장성의 정상에 올랐다는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사무실이 있으며 이 비석 앞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룬다. 중국 사람들의 관우장군과 모택동에 대한 감정은 남다른 것 같다.
북경은 변변한 산 하나 없이 끝없는 평야로 이뤄졌다. 그래서 자금성을 배산임수 지형으로 만들기 위해 백성을 동원해 인공산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점으로 미뤄보면 830m의 험준한 산은 군사적으로 의미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에 보면 명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원의 순제를 북쪽으로 밀어냈을 때 몽골족을 막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작용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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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안에 건설된 당시 관부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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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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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용관 입구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누각이 있고 양쪽 봉오리에 누대가 있는데 양식은 우리나라의 성곽 양식과 비슷하고. 다만 더 높고 웅장하다는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1342년에 건설한 운대가 거용관 볼거리의 으뜸인데 장방형 석재로 기단을 쌓고 위는 난간석이 있으며 아치형 문이 있다. 입구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문을 통과하더라도 그 안에 갇히기 때문에 방어에 용이하게 처리돼 있다. 운대 좌우로 하여 양쪽 봉우리를 타고 장성이 펼쳐지는데 정상에는 누대가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위로도 성이 건설돼 있어 그 또한 장관이다.
문 주변에는 당초문을 비롯해 용, 신장, 운문, 연화문이 있고 기둥에는 코끼리, 태극, 기린, 십자형, 운문, 금강저 등이 있으며 운대 안쪽 벽에는 한문과 범어가 조각돼 있고
사천왕상과 여러 불상이 있고 천장에는 작은 불상들이 연화문 꽃밭에 둘러 싸여 있다. 건설과정에서 혹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터인데 마치 이곳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인양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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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룡관을 알리는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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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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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용관은 만리장성 6350㎞를 관장하는 3개 관중 북경을 방호하는 중심축 역할을 하였는데 흉노족의 남하를 막는 역할을 했으며 동쪽 끝 발해만과 만나는 지점에는 산해관이라 하여 주로 여진족을 방호하는 곳이 있고 서쪽 끝으로는 감숙성에 가옥관이 있다. '사기'에는 만리장성은 요동에서 임조까지 이어진다고 기록돼 있다. 그 규모가 오로도스라는 대사막과 항하강을 전부 덮은 크기이니 달나라에서 유일하게 관측되는 건축물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닐 듯도 하다.
거용관을 뜻풀이 하면 '머무르는데 쓰이는 관청'이라는 말이 되는데 현지 조선족 가이드인 강문룡(34·남)씨는 중국에서는 용(庸)자에 죄수의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죄수를 통해 유지·보수하였다는 해석을 한다고 귀띔했다. 이곳이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재로 사용된 것은 명나라 훨씬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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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나라 병사의 모습과 병기를 복원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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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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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관리기 부정을 저지르면 성을 쌓는 곳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몽념전(蒙恬傳)'에는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몽념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에 가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30만 대군과 수백만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과가탑(過街塔)은 1345년이 지어졌으며 예전에는
라마교의 탑도 있었다고 하니 원나라 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재로 과가탑에는 인도전설에 커다란 뱀을 잡아먹는 것으로 알려진 금시조(金翅鳥)와 뱀신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를 뒷받침 한다. 또한 다라니경이 산스크리트문자, 위그루문자, 티벳문자,
서하문자,
파스파문자, 한자 등 6개 국어로 새겨져 있어 전쟁과 이주 외에도 이곳은 주요 교역의 창구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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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원혼들을 달래줄 6개국어로 쓰여진 과가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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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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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성 축조 기법은 양쪽에 판을 세우고 안에 흙과 물을 개어 넣은 것이 주류였으나 거룡관은 호야토를 일정 크기의 틀에 넣어 흙벽돌을 만들고 불에 구워 만들었다. 성의 색은 전체적으로 검회색을 띠고 있는데 그 견고함과 튼튼함이 그 오랜 풍상에도 끄떡없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만든 것으로 배웠으나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거룡관에서 수백㎞ 떨어진 북쪽에 있고 이미 군웅 7개국이 할거했던 전국시대에 서로의 국경에 성을 쌓아 그 틀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이러한 성들을 연결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흉노족 등의 침입에 방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여행에 동반한 중국통 박영철(49·남)씨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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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의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방부가 아니다'라는 휘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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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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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일하고 막강한 전제통치를 하던 진시황에게 장성의 의미는 방어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책이란 서책은 모두 불살랐던 '분서갱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을 두려워했던 진시황은 사상적 통제 외에도 수많은 전쟁포로와 지식인, 백성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호전적인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두려워 조선침략을 결정했던 것처럼 진시황 또한 반대세력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도구로 만리장성 축조를 활용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해야 안심하고 잠드는 진시황제의 고도의 통치술, 이것이 권력의 본성이다."실제로 만리장성이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최후 방어선이라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는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수도인 낙양과 평성은 장성 안에 있으며 위진(魏晉) 이후 여러 민족들은 장성 안에 그들의 나라를 세웠다.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 때에는 만리장성을 방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의 침입으로 평성에서 포위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를 보면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 외에도 정치적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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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위를 건너는 성의 전경도 일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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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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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 함양(咸陽) 건설 외에도 자신의 궁궐인 아방궁과 자신의 묘지인 여산능(驪山陵) 축조에도 70만의 죄수를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몇 천원을 훔치고도 몇 년 옥살이 하고 수백억을 훔치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요즘 세태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만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명나라는 거용관이라는 세계적 문화유산을 만들었지만 청나라를 세운 금과의 전투에서 만리장성은 무용지물이었다. 당시 북경으로 진격하던 이자성의 군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거용관을 거의 무혈 입성했다고 전해진다. 4백만에 불과한
만주족은 13억 중국인의 95%를 차지하는 한족의 나라 명을 단숨에 차지했다. 수많은 성과 봉화대가 있었지만 이자성의 군대가 자금성에 도달할 때까지 황제와 신하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3억 명의 중국 백성들 중 봉화를 올릴 단 한사람의 지지자도 가지지 못한 나라가 바로 명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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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룡관의 입구인 '천하제일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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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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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나라의 수명은 불과 16년에 불과했다. 만리장성과 아방궁
진시황릉, 그리고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는 시황제의 권력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진을 무너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름도 다 외울 수 없는 수많은 프로젝트와 대안 없는 비판만이 난무하는 요즘 정치를 보면 우리정치도 국민들의 고혈을 짜 또 다른 만리장성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싶다. 외적의 침입도 막지 못하고 백성들의 피눈물만 가득한 만리장성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알아야 한다. 당장 국민들의 눈총을 따돌릴 이벤트 보다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줄 따듯한 장성을 만드는 정치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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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백쌍의 합동결혼 후 백년해로를 위해 채웠다는 열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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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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