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이론

판소리 논문-참고2 [판소리이해]

土譚 2006. 3. 17. 19:21

판소리의 이해

이 원 수

1. '판소리'란 말의 뜻

판소리는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발흥과 함께 생성, 발전해 온 전통적 연행예술(演行藝術)로서, 전문적 소리꾼인 광대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말과 노래로 이야기를 연창하는 구비적 현장예술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인데, '판'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뜻풀이도 달라진다. '판'을 <많은 사람이 모인 곳>으로 이해하면, 판소리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부르는 소리>가 되며, '판'이 '판을 짠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 판소리는 <판을 짜서 부르는 소리>가 된다. 이때 '판을 짠다'는 것은 <사설에 적절한 악조와 장단을 배합하여 판소리를 구성한다>는 뜻도 되고, <대목 대목을 연결하여 완성된 작품을 만든다>는 뜻도 된다. 이 밖에 '판'은 <판에 박힘> <행위의 시종일관된 과정> 등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판소리의 어느 한 측면만 각각 주목하고 있어, '판'의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 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판소리의 현장성과 음악성, 부분의 독자성 등을 고려할 때, '판'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뜻과 <판을 짠다>는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며, 그렇게 보면 판소리는 <많은 사람이 모인 소리판에서 판을 짜서 부르는 소리>가 된다.
다음 '소리'란 말은 '노래'와 구별되는 용어로서, 여기에는 판소리의 표현매체·문학적 내용·구연 방식과 관련된 다양한 뜻이 담겨 있다. 먼저 '노래'는 사람의 성음만을 매체로 하나, 판소리는 성음은 물론 자연의 음향까지 포함하는 모든 소리를 매체로 이용한다. 또한 '노래'가 대체로 짤막한 주관적 시를 노래로만 표현하는 데 비해, 판소리는 장편의 이야기를 말과 노래의 순환적 교체를 해 표현한다.
'판'과 '소리'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면, 판소리란 말의 뜻은 결국 <많은 사람이 모인 소리판에서 여러 대목들로 짜여진 긴 이야기에 장단과 악조를 배합하여 말과 노래로 구연하는 연행예술>로 풀이될 수 있다.

2. 판소리의 갈래적 성격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광대는 말과 노래로 이야기를 구연(口演)하며 가벼운 몸짓을 하고, 여기에 고수와 청중의 임새가 어우러져 판소리의 연행(演行)이 이루어진다. 판소리에는 음악적 요소·서사적 요소·극적 요소가 모두 포함돼 있으며, 이는 판소리가 그 만큼 복합적 성격의 예술양식임을 말해 준다.
판소리의 갈래적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이들은 크게 보아 독자적 예술양식이라는 견해·음악이라는 견해·극양식이라는 견해·서사양식이라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독자적 예술양식이라는 견해는 '판소리는 판소리다'라는 것으로, 판소리를 다양한 문학 갈래와 음악이 결합된 독특한 예술형태로 보는 입장이다. 이는 판소리가 우리만의 고유한 예술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판소리가 음악·미술·문학처럼 하나의 독자적 예술양식으로 설정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은 보편적 현상이니, 문학과 음악을 분리하여 갈래 설정을 할 필요가 있다.
음악이라는 견해는 창이라는 구연방식에 주목하여 판소리를 민속악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판소리는 창으로만 구연되는 것이 아니라 아니리로도 구연되며, 사설의 내용에 따라 장단과 악조가 선택되는 만큼 판소리에서는 음악보다 문학이 더 중심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음악과 문학은 상보적 공존이 가능하니, 음악이냐 문학이냐는 판소리 갈래 논의에서 쟁점이 되기 어렵다.
문제는 문학으로서의 갈래인데, 여기서는 극이라는 견해와 서사라는 견해가 서로 대립되어 있다. 먼저 극으로 보는 쪽은 판소리가 연행예술이라는 점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판소리는 일인극 형태로서 관중을 상대로 무대에서 공연되며, 발림은 배우의 연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사로 보는 쪽은 판소리는 구연이 핵심이고, 발림은 이의 보조 동작일 뿐 연극적 행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판소리는 동작과 대화만으로 작품을 이끌어가지 않고 서술자를 개입시킴으로써,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할 부분을 말로 진술하거나 바탕글을 통해 사실을 설명하기도 하는 등 '사실들의 총체' 혹은 '설명과 표현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과거시제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극이 아닌 이야기의 구연 형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현재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마지막의 서사갈래설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다시 생각해 볼 점은 많이 남아 있다. 판소리는 분명 연행예술이고, 판소리의 예술성은 광대의 연행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사설 중심의 서사갈래론으로는 이를 설명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판소리는 광대의 연행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작품이 되며, 연행되지 않은 판소리는 판소리가 아니다. 연행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예술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 발림은 물론 구연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설이 바로 '대본'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사설에는 광대의 구연방식·발림·악조(樂調), 고수와 청중의 추임새 등에 대한 지시가 전혀 없다. 따라서 판소리가 극이냐 서사냐 하는 것은 사설이 아닌 대본을 근거로 논의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판소리는 소도구 없는 '빈 무대'에서 일인 다역의 형태로 연행된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판소리는 관중의 상상력에 그 만큼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그 연행 기법 또한 사실적 연극과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연행자가 종종 작중 화자로 직접 전환하는 현상 또한 서사갈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처럼 판소리 갈래 문제는 아직 재론돼야 할 점이 많이 남아 있으며, 판소리는 '연극과 서사문학의 중간형태'라는 절충론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판소리는 판소리다'라는 견해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주며, 역으로 판소리의 갈래적 성격이 그 만큼 단순치 않음을 말해 준다. 판소리의 갈래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3. 판소리의 형성과 전개
판소리가 처음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다. 판소리의 연원에 대해서는 문장체소설 기원설·설화기원설·중국 강창문학(講唱文學) 기원설·서사무가 기원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현재는 서사무가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사무가 기원설은 호남지역 세습무(단골무)들의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가 유래했다는 것으로, 이는 둘 사이의 유사성에 일차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사설이 장편의 이야기이고, 그 연행방식이나 음악적 장단·가락이 비슷하며, 반주자의 추임새가 있고, 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연행되는 등 서로간에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호남지역 단골무의 경우 여자들은 무업(巫業)을 계승하고, 남자들은 조무(助巫)나 악공 노릇을 했는데, 초기 판소리 명창들 중에 이들 세습무가(世襲巫家) 출신들이 많았던 점도 이와 관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판소리가 서사무가는 아니며,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우선 사설의 내용에 있어 판소리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일상적 인물의 세속적 삶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서사무가는 무속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영웅적 인물의 신화적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판소리가 흥미거리의 이야기임에 비해 서사무가는 신성시되는 이야기이며, 판소리는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연행될 수 있지만, 서사무가는 굿판에서만 연행된다. 판소리의 창작과 전승이 개방적이라면 서사무가는 폐쇄적인 셈이다. 또한 서사무가는 고대 영웅서사시의 맥을 이어 오랜 전승의 내력을 지닌 반면, 판소리는 조선후기에 와서 새롭게 형성되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가 파생되고, 또 이처럼 전혀 다른 예술 형태로 발전해 간 것은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먼저 조선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상행위가 일반화되면서 예술 또한 상품화가 가능했고, 경제력을 지닌 신흥 서민층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흥미롭고 현실적인 새로운 예술을 요구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무속의 쇠퇴와 더불어 생활이 어려워진 세습무가(世襲巫家) 출신의 광대들이 직업적 소리꾼으로 적극 진출하게 되면서 판소리가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서사무가의 연행방식이나 장단·가락 등은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기존의 흥미있는 설화들을 부연·각색하여 사설만 새롭게 꾸며내면 판소리로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단정지을 수 없지만, 1754년(영조 30년)에 지어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를 통해 볼 때 대체로 숙종 연간인 17세기 후반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작품은 판소리와 직접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서 <춘향가>를 2백구의 칠언시로 한역한 것인데, 작자는 호남지역을 여행하다 광대의 판소리를 구경한 뒤 이를 지었다고 한다. 이 만화본은 <춘향가>의 줄거리를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이는 곧 18세기 중엽에 이미 완성된 판소리가 시정에서 널리 불리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양반 신분의 그가 <춘향가>를 한역했다는 사실은 판소리가 이미 양반층의 관심을 끌 만큼 예술적으로 성장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판소리가 천민 광대의 예술로 처음 형성된 시기는 이보다 상당히 앞선 시기였을 것이며, 그것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17세기에 활동했던 광대 박남(朴男)이 판소리 명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도 이는 뒷받침된다. 물론 이때 형성된 초기 형태의 판소리는 오늘날의 그것과 달리 사설도 비교적 짧고, 음악적으로도 덜 세련된 소박한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호남지역에서 처음 형성된 이러한 초기 형태의 판소리가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학적·음악적 세련을 더하면서 본격적 발전을 하게 된 것은 영·정조조인 18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중인·상인 등 서울지역 중간층들의 애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춘대·하한담·최선달 등 전문적 예인으로서의 명창이 본격 등장하고, 판소리 열두 마당이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였을 것이다.
이어 순조조인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권삼득(1771-1841)·송흥록(1801-1863)·염계달·모흥갑·고수관 같은 명창들이 활동하고, 그들의 독특한 창제(唱制)와 더늠이 개발되면서 판소리는 한층 예술적으로 세련되었다. <관극절구(觀劇絶句)>(신위: 1826)·<관우희(觀優戱)>(송만재: 1843)의 존재나, 비가비 광대의 출현 등이 말해 주듯, 판소리 담당층이 양반층에게까지 더욱 확대되었으며, 명목뿐이긴 하나 모흥갑·송흥록 등 명창들이 당상관의 직첩을 받을 정도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다.당상관의 직첩을 받을 정도로 명창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고종조인 19세기 후반 판소리는 그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집권자였던 대원군의 판소리 애호도 한몫을 하였다. 박만순·이날치·김세종·정창업과 같은 명창들이 이때 활동했으며, 진채선과 같은 여류 명창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특히 이 시기에 신재효(1812-1884)에 의해 판소리 이론이 체계화되고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었으며, 전문적 판소리 교육이 실시된 것은 판소리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또한 당시까지 전승되던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여섯 마당 사설을 정리하여, 자구(字句)의 오류를 바로잡고, 불합리한 부분은 합리적으로, 저속한 표현은 점잖은 표현으로 고치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설 개작에 대해서는 현재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전성기를 맞았던 판소리는 20세기 들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여기에는 시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전통문화의 가치를 왜곡·비하하던 식민지배와, 새로 들어온 근대적 연행문화들은 판소리의 전승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이러한 위기에 맞서 판소리는 종래의 연행방식 고수(固守)와 창극으로의 전환이라는 양면적 대응을 꾀했으나,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임방울과 같은 뛰어난 명창이 나타나 판소리의 정통성을 지키고, 그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판소리는 오늘날까지 자체 전승되어 왔으며, 근래 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다.

4. 소리판의 구성과 판소리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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