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걸작’에 판소리 선정… 소리의 부활을 예고하는 ‘판소리의 젊은 명창들’ 우리나라 판소리(중요무형문화재 5호)가 경사를 맞았다.
11월7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판소리를 ‘인류 구전ㆍ무형 유산 걸작’에 선정했다는 낭보가 전해진 것이다.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 걸작이란 소멸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독창적인 구전·무형 유산을 선정해 그 나라 정부와 각종 단체들이 이를 지원하도록 하는 제도다.
걸작에 선정된 나라는 유네스코에 보조금과 전문가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걸작’에 뽑힌 데 이어 두 번째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은 셈이다.
걸작 선정이 발표되자마자 이 소식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각 언론사 문화 담당 기자들에겐 과자상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기념 음반집이 전달되었다.
<판소리의 젊은 명창들>(신나라레코드). 흔히들 판소리를 좀 듣는다 하면 고 박동진 선생을 비롯해 오정숙·안숙선·성우향·성창순 같은 관록 있는 명창들의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젊은 명창들>은 이들 스승 명창의 소리를 올곧게 이어받되, 20대 명창 5명의 낭창한 소리를 담은 음반이다.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판소리 다섯 마당을 골고루 담았고 판소리의 형식과 역사, 장단 등에 대한 상식과 사설집을 영문으로 실어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이 패기의 소리로 거듭나 5명의 창자 중 단연 돋보이는 소리는 장문희(27)씨의 <수궁가>다.
김연수-오정숙-이일주로 내려오는 계보를 물려받은 장씨는 이일주씨의 조카딸로 허공을 가르는 듯한 힘차고 짱짱한 목소리와 고음과 저음을 오가는 드라마틱한 소리를 여유 있게 소화하는 기량이 인상적이다.
중국 강남으로 날아간 제비가 두견새가 주재하는 백조 점고에 참여해 ‘보은표 박씨’를 물고 흥부네 집으로 돌아오는 멀고 먼 여정을 속도감 있게 묘사한 ‘제비노정기’, 흥부네 식구들이 온갖 종류의 비단이 쏟아져나오는 박을 흥겹게 타는 장면이 담겼다.
장문희씨의 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연수의 스승이었던 정정렬까지 올라간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이른바 ‘5명창 시대’를 주름잡았던 정정렬은 고음이 잘 나지 않는 ‘떡목’이라는 한계를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하고 판소리 현대화를 주도한 이다.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지 않아 몇번씩 소리를 그만두고 죽어버리려고 했다는 정정렬은 20여년의 수련기간 끝에 고음을 포기하는 대신 ‘도끼로 장작 패는 듯’ 크고 깊은 저음을 내게 되었다.
또 껄껄한 쇳소리에 슬픈 느낌을 애절하게 담아낼 줄 알았던 그는 일제시대의 처량하고 구슬픈 시대 정조와 맞아떨어져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에게 소리를 배운 동초 김연수는 당시 배움이 없었던 소리꾼들 가운데 유일하게 중등중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판소리를 극적인 구성으로 바꿔냈고 장면마다 화려한 너름새(몸짓)를 넣어 입체감 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김연수의 수제자인 오정숙은 타고난 목에 김연수의 연출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무대에 일단 오르면 좌중을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 있는 명창으로 이름나 있다.
음반에 실린 소리꾼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정은혜(20)씨 역시 정정렬로 시작해 최승희로 이어지는 소리를 이어받았다.
슬픈 소리에서는 따를 이가 없었던 정정렬은 <춘향가>에서도 몽룡과 춘향의 이별 장면을 두 군데로 늘려 애잔함을 더했다.
춘향이 ‘오리정’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몽룡을 전송하는 ‘오리정 이별’은 정정렬 바디(유파를 일컫는 말)에만 있는 대목이다.
굽이굽이 고개 너머로 자꾸만 멀어져가는 몽룡을 지켜보는 춘향의 아픔을 정은혜씨는 명료하면서도 산뜻한 소리와 정확한 기교로 절절하게 묘사한다.
박유전-정재근-정우민-성우향-안애란을 이어받는 현미(25)씨는 구수하고도 유장한 소리를 구사한다.
이번 음반에서 심청의 인당수 투신 장면을 노래하는 그는 늘어지는 소리를 감칠맛 나게 이으면서 ‘바람 불고 물결 치는 대천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심청의 기막힌 심정을 표현한다.
보성 소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서편제는 본래 보성 강산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박유전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한쪽 눈이 곪는 바람에 외눈으로 살았는데 판소리를 유난히 좋아했던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선글라스’(오수경이라고 불린 검은 안경)를 선물받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는 대원군의 집에 드나들어 유생들의 의견을 토대로 계면조의 아름답고 슬프면서 정교한 서편제 소리를 집대성했다.
스승 명창의 대를 이어갈 재목으로 꼽혀 별주부가 세상에 나와 높은 하늘과 처음 만나는 ‘고고천변’(<수궁가> 중) 대목을 부른 임현빈(29)은 일제시대의 뛰어난 명창 임방울과 한 집안이면서 명창 이난초의 외조카로 ‘판소리 명가’ 출신이다.
‘천년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한 명창’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임방울은 처음엔 서편제 소리로 시작해 전통 동편제 직계를 잇는 유성준을 사사해 서편제와 동편제 소리를 창조적으로 조화했다.
춘향이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혀 부르는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당시 음반으로 취입돼 100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임현빈씨는 밝고 따스한 목청에 뛰어난 기교를 더해 용왕 앞에 끌려간 토끼의 황당한 사정을 묘사한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낯선 <적벽가>는 가장 남성적이고 호방한 소리로 알려져있다.
남상일(24)씨는 적벽강에 동남풍이 차차 이는 장면을 구수하고도 흥겨운 소리로 묘사하는가 하면,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이 자식·부모·고향 생각에 우는 장면을 서글프면서도 씩씩하게 노래한다.
군산대 최동현 교수(국문학과)는 “판소리가 가장 몰락했던 60~70년대엔 제자를 제대로 기를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소리공부를 해야 했을 30대 소리꾼들의 층이 매우 얇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번 음반에 실린 20대 명창들의 소리는 판소리 부활을 보여주는 생생한 물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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