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보러 왔다가 봄꽃만 실컷 보았네
장승, 우리 것이면서도 참으로 이국적인 우리 것이다. 마을 입구 적당한 곳에 세운 장승은 마을에 따라 생김도 가지각색이다. 퉁망울 눈이 있는가 하면 찢어진 눈도 있다. 입과 입술은 세층 두층, 아예 그림으로 때운 것도 있다.
따뜻한 봄날 오후 시간이 생겼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맞다! 장승들을 만나러 광주로 가자. 지난 가을에 만났던 광주의 장승들은 수명이 다해가고 있어서 어쩐지 쓸쓸해 보였는데, 이 봄의 장승은 어떤 모습일까? 혹시 지난 정월 대보름 때, 마을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 세우지는 않았을까? 세웠다면 또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면서 올림픽도로를 달린다.
길가에 지하여장군 두 분이 서 있다. 두 분의 생김도 많이 다르다. 작은 눈과 큰 입, 큰 눈과 작은 입, 머리 장식 가만히 보면 두 장승은 대단히 상대적이다. 한쪽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우고 있는 듯하다. 건너편 천하대장군의 모습도 지하여장군과 똑같다. 이름만 달리 하고 있다. 끼워 맞춘 귀가 떨어져 나갔고, 솟대도 제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새로 고치거나 수리하지 않는다. 그냥 놔둔다. “야 저기 꽃 좀 봐라” “저게 무슨 꽃일까? ” 평소에 꽃에 관심이 많은 동료 하나가 화들짝 생기가 돈다. 장승 주위에 봄꽃들이 또 다른 잔치를 벌이고 있다. 꽃다지 꽃이 떼지어 피었다. 초록잎색과 노랑 꽃잎 색이 어울려 조그만 연두색 천지를 만들고 있다. 하얀 흰꽃들도 많지만 이름을 모르니 아직 내게는 꽃이 아니다.
천하대장군 장승터는 참나무 당상나무와 함께 길 한가운데 나앉았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곧은길을 만들다 보니 길이 장승자리를 통과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장승을 살렸다. 장승자리는 도로 한가운데 장승섬이 되었다. 차량 통행이 복잡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정감이 간다. 운치마저 있다.
꽃이 있으니 벌이 없을 수가 없다. 벌들도 한창 바쁘다. 애기똥풀은 군데 군데서 하늘거리며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하여장군 뒤쪽에는 조팝나무 흰꽃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사람들은 점차 장승구경에서 봄꽃구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금 더 걸으면 서하리 장승이 길과 논 가운데 나타난다. 같은 마을이어서인지 안골 장승과 서하리 장승은 모습이 대강 비슷하다. 동네마다 장승들은 생김이 모두 다르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새로 만들어 세울 때는 이전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다. 그래서 마을의 장승 생김의 전통을 만들어 간다. 지하여장군은 느티나무 아래 토단 위에 서 있고, 천하대장군은 논 한가운데 제법 큼직한 토단 위에 서 있다. 역시 올해 초에 새로 세운 젊은 장승도 보인다. 젊은 장승들은 서로 마주 보고 눈길을 주고받고 있다. 천하대장군 옆에는 역할을 끝내고 죽은 장승이 비스듬히 누워있다.
“여기를 한번 보세요, 요게 서양민들레이고 저게 토종 민들레랍니다. 색깔도 차이가 나지만 꽃받침이 서양민들레는 이렇게 발랑 뒤집어 졌어요.” “우리 민들레 색깔이 훨씬 은은한 게 멋있는 것 같애요. 그런데 서양 민들레가 훨씬 많네요.” “저기 흰민들레도 있네요. 흰 민들레는 요즘 보기가 제법 힘들어요.”
이제 무갑리 장승 차례다. 무갑리 마을은 얼마 전까지 소인지 돼지인지 축사로 가득 찼던 동네였다. 온 동네가 퀴퀴한 냄새로 진동했는데, 이제는 축사가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개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남방적제장군이 서 있고 내를 건너서 북방흑제장군이 서 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다른 이름이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했던 것은 역병 즉 전염병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물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장승을 냇가를 사이에 두고 세우고 역병의 침입을 막게 했다. 무서운 얼굴과 색깔로 역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붉은 악마’ 무갑리 장승을 뒤로하고 다시 북으로 엄미리 장승을 찾아간다. 남한산성 표지판을 지나고, 엄미리 계곡으로 들어간다. 엄미리 계곡은 계곡 전체가 개발중이다. 깊은 계곡은 여름기간 내내 유흥지가 된다. 그래서 새로운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장승조차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아래말 장승 중에서 길가에 서 있었던 천하대장군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 잃은 여장군만 내 건너에 불쌍하게 서 있다.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는 전국적으로 나무장승이 가장 많다. 장승은 아마도 고려시대 마을마다 만들어 세운 미륵불의 전통을 이은 마을 신앙물인 듯하다. 숭유억불의 나라 조선에서 마을사람들의 수호신이자 가장 가까운 기복물로 미륵불에서 장승으로 변한 것이다. 장승에는 재료에 따라 돌장승과 나무장승으로 나뉜다. 광주 일대에는 왜 나무장승을 세우게 되었을까? 또 추측을 해 본다. 광주군에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를 굽던 사옹원의 분원이 있던 곳이다. 자기를 굽는 데는 엄청난 나무가 필요했다. 한 지역에서 자기 가마를 10년쯤 운용하면 나무가 고갈되어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고 다듬을 수 있는 나무로 장승을 만든 것이 아닐까? 엄미리 안마을 장승은 이 곳 광주일대 장승 중에서 가장 장승다운 자리와 모습을 간직하고있다. 천하대장군은 정말 잘 생긴 할아버지 같다. 사모관대에 수염까지 근엄하게 갖추었다. 제단도 사소하지만 준비되어 있다. 음식과 막걸리 병이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나들이 나갈 때나 들어 올 때 이 장승들을 만난다. 소원이 있으면 막걸리 부어놓고 ‘장승분’에게 빈다. 울화통이 터지면 ‘장승놈’에게 화풀이도 한다. 장승은 근엄하지만 인자한 자태로 마을사람들의 온갖 푸념을 다 들어준다. 천하대장군 주변에 흰꽃이 또 잔치를 벌이고 있다. 무슨 꽃일까? 별꽃 같기도 한데, 아니다. 쇠별꽃인가 점나도나물인가. 카메라에 담고 가서 꼭 이름을 알고 말리라.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댄다. 내 건너 지하여장군은 저 멀리 있다. 엄청나게 큰 참나무 아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은 천하대장군과 마찬가지로 황토 흙을 잔뜩 발랐다. 역시 벽사의 의미이리라. 이 지하여장군이 현재에도 가장 장승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는 듯하다. 주변 분위기가 제법 신령스럽다. 큰 나무 아래 한적한 곳에 할머니 장승 두 분이 서서 무어라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산댁 큰 아들은 왜 저렇게 사업이 안 풀리지?” “글쎄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번에 대처로 나간 만식이는 어떻게 되었나?”
“같은 현호색인줄 알았더니 꽃모양과 색이 다른 게 있네.” “잎의 모양은 영 다른데. 어떤 것은 당근 잎 같은데, 어떤 것은 대나무 잎 같애.”이 정도 되면 현호색은 분류되기 시작한다. 현호색, 댓잎현호색, 당근잎현호색(이런 이름이 있나?). 이런 자리에서는 단소를 불어야 한단다. 무슨 곡이 가장 어울릴까? 지하여장군이니 아무래도 애절한 곡이 좋을 듯하다. 계면가락도드리로 정했다. ‘노라 러루라 라루라 느노’ 지하여장군이 빙긋이 웃는다. 꽃들도 덩달아 웃는다. 계곡도 산들도 신록을 머금고 빙긋이 웃는다. 장승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게 장승여행인가? 봄꽃여행이지’라는 한 동료의 여행 평가가 가슴에 와 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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