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이론

사적 흐름으로 본 장고춤의 교육적 효용에 관한 연구

土譚 2009. 4. 3. 06:20

사적 흐름으로 본 장고춤의 교육적 효용에 관한 연구



                                                                                

목차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방법 및 제한점


Ⅱ. 장고춤의 형성과 사적 변천

     1. 생성동기

     2. 변형된 형태


Ⅲ. 장고춤의 실용화 방안

     1. 장고춤의 유형적 분석

     2. 교육 실용화 방안

     3. 전통춤으로서 전승보전을 위한 예술적 실용화 방안


Ⅳ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Abstract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른바 민족 주체성이나 민족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일제치하에서는 전통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투쟁 방법이 되었고, 서양 제국의 문물사조가 물밀 듯 밀려올 때에 그것은 응전(應戰)의 방식이었다. 역사상 분단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민족의 근원적 동질성은 전통 속에서 찾아야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전통은 여러 가지 의미로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다. 전통의 핵심은 아무래도 민속적인 것이다. 한국무용의 수많은 민속춤의 종목 중에 장고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속무용의 예술적 미를 알리고 정서적 신명과 흥이 깃든 장고무의 사적 변천에 따른 성향의 분석과 체계적인 이론의 규명은 장고춤의 효용에 관한 무한한 예술적 발전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장고춤은 기록에 의하면 국내에서는 삼국시대로부터 장고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차츰 춤으로 이어져 놀이문화에서는 빠지지 않는 중요한 리듬악기로, 때로는, 민중의 신명의 악기로서 서민의 시름을 달래주는 흥으로, 그리고 무속의 문화에서 또는 유랑집단 및 기방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한에서 흥으로 풀어나가는 악(樂)으로서의 풍류적 성향을 보이며 변천되어 왔다. 이후 신무용기 최승희 이후 많은 무용가들에 의해 재구성되어 계승 발전되어온 장고춤은 무대적 세련미와 한국적 정서를 반영하면서 예술적 미를 재조명하게 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민속춤으로서의 장고춤의 전통 보전적 차원과 풍류적 멋이 깃든 예술적 형태를 통해 그 원형에 대한 탐구가 앞으로 계승 발전될 한국 전통춤의 창조적 기반으로서의 이론적인 규명에 큰 의의를 가지며, 신무용기에 접했던 동서양의 세련된 공존적 양식의 유형적 특징을 논의함으로써 전통예술의 교육적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2. 연구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말기와 신무용기에 걸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고의 역사와 형성과정 그리고 변천과정을 학위논문 및 장고춤에 관한 문헌적 기록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비디오 자료를 참조하고 있다.


첫째, 각 시대를 걸쳐 신무용기까지 재구성되어 발전해 온 장고춤에 대한 형성과정을 이론적으로 체 계화한다. 이는 장고의 역사적 배경과 원류를 헤아려 민중놀이로서 장고춤 의 역할 및 중요성을 인지하고자 한다.

둘째, 신무용기에는 재구성되어진 장고춤의 형성배경은 최승희의 공연자료를 근거로 하여 살펴본다.  

셋째, 정재무가 주종이 되었던 기방문화에서의 장고춤의 민족적 정서를 입증하고 나아가 현 무용교육의 실정에서 장고춤의 위상과 교육무용으로서의 효과적 방안을 논하고자 한다

넷째, 본 연구는 장고춤이 공연되어진 시대사적 변천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그 원류를 근거로 이론적 정립을 위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장고춤이 민속춤으로써 존재 할 뿐 문화재적인 입증을 거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여 장고춤 분석에 관하여는 연구의제한을 두고 있다.

다섯째, 신무용기의 장고춤의 사적 흐름에 관한 이론적 배경으로 ‘신무용’이란 용어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모든 제도가 바뀌어 궁중무용까지도 연희의 대상이 특정계층이 아닌 일반인을 위한 무용으로 탈바꿈하는 시기부터로 한정하고 있다.

Ⅱ 장고춤의 형성과 사적 변쳔


 1. 생성동기


1949년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발굴된 제 3호분(虎賁)의 벽화에는 10종의 악기가 보인다. 이홍직(李弘稙)의 고증에 의하면, “그 분묘의 주인공은 사상 뚜렷한 요동(遼東) 의 모용씨 밑에 있다가 고구려로 망영한 동수(冬壽)이고, 이 고분은 영화(永和) 13년 (357년) 에 營造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라고 하였다. 이 4세기 후반에 고분 벽화는 그 당시에 사용되던 음악의 형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의 回廊의 행렬도에는 수레의 앞에는 담고(擔鼓)와 담종(擔鐘)을 치는 악대가 있고, 수레의 뒤에는 이중고(二重鼓).소(簫). 각(角). 탁형 타악기를 가진 말을 탄 악대가 따르고 있다. 이러한 편성 악기에 의하여 행렬에 따른 악대를 고취(鼓吹)라 하는데, 이는 한대(漢代)의 군악의 하나인 단소(短簫)요가와 비교 될 것 같다. 회랑 대행렬도에서 앞부분에 장고와 비슷한 모양의 악기를 든 악사가 행렬의 앞부분에 서 있다. 팔청삼국시대의 악무에서는 고구려가 집안현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산상왕 13년(209) 년이다. 그 후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 (427년)이고, 중국 중원과 함께 소륵, 안국과 통하게 된 시기는 후위가 북연을 평정한 439년 뒤부터이다. 즉, 이 시기까지는 서역 음악이 고구려에 소개되지 않았다. 이시기의 악기들이 사용된 흔적을 고분벽화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팔정리 고분 벽화를 보면 주인공의 앞에는 고취악대가 배치되고 그 뒤에서 여러 가지 잡희(雜戱)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와 1941년 지안현 고구려 고분 발굴에 참여한 바 있는 이여성의 ‘고구려 벽화’와 송석하의 ‘집안 고구려 고분과 악기 등을 종합하면 거문고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4현의 현악기 완암(阮咸). 장소(長簫). 대각(大角). 삼각형의 배소(排簫).요고(腰鼓). 취구가 중간에 있고 두 손으로 마주 잡고 부는 대적 등이 악기가 보인다. 삼국사기 악지(樂志) 말미에는 당(唐)의 두우(818~907)의 통전(通典)과 북사(北史)에 장고를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 문종(文宗) 30년에 장고업사(長鼓業事)가 있었다는 기록이고, 지금 장고보다 작은 것은 고구려 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하대 주악도. 감은사지 앞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리기기단에 새겨진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券7 의 당악기도설 장고조를 보면


문헌통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갈고, 장고, 요고는 한나라, 위나라에서 사용되었다.

요고의 통이 큰 것은 질그릇으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모두 머리는 넓고 허리는

가늘다. 송의 소사의 소위 세요고가 이것이다. 오른 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친다. 후세에 이것을 장고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는 화하고 장하며, 절이 있다(이혜구, 2000).


 라고 되어 있고 ,또 ”당악향악보용지(唐樂鄕樂普用之)“라고도 기술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장구는 삼국시대”(이혜구, 2000)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어 온 중요한 리듬 악기인 것이다(박은하, 2000).” 이외에도 장고는 당악과 향악에 아울러 쓴다고 되어 있는데, 수(隨)의 구부기(九部伎). 서량기(西涼伎) 구자기(龜玆伎) 등을 비롯해 당(唐)의 십부기(十部伎). 열(列) 한 제기(題伎) 와 고구려악 등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에 요고(腰鼓)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수(隋)의 요고는 세요고(細腰鼓)라고도하며 타악기의 일종인 장고(長鼓)이다. “큰 것은 개와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들며, 머리는 넓고 배는 가는데 본래 호고(胡鼓)이다.“ 라고 한바와 같이 요고는 호지(胡地)의 악기였다 갈고(羯鼓)는 양장고(兩仗鼓)라고도 한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두 손으로 함께 치며 갈중(羯中)에서 나온 까닭으로 갈고(羯鼓)라 호(號) 하였는데, 양장고(兩仗鼓)라고 한다.“ 라고 하였고 태평이라 해서 갈고(羯鼓)라고 한다. 이 악기는 작은 아상(牙床)위에 놓고 양장(兩仗)으로 치는데, 그 음이 초살명렬(焦殺䳟烈) 함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일본의 갈고(羯鼓)의 타법을 연상케 한다. 일본의 갈고는 작으며 대(臺)위에 놓고 양장으로 급촉하게 명렬하나 현재의 우리나라 갈고는 대형에 속하며 악기만 전하고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장고와 갈고(羯鼓)도 삼국 시대에는 이와 같이 작은 것 이였으나[악학궤범]의 것과 같이 대형으로 바뀐 것은 다른 향악기의 음색과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구부기 중 이 두 악기를 서량기(西涼伎)와 고려기에만 보인다. 명(明)의 [사림(事林)감주]에도 제고는 서량(西涼)의 고려악이라 하였다. 답랍고(答臘鼓)이하 8가지의 북은 거의 서역 계 음악에서만 사용되던 악기들이다. 답랍고(答臘鼓)는 갈고(羯鼓)보다 넓고 길이는 짧으며 손가락으로 치는 북인데 해고(楷鼓)라고도 한다. 도담고(導曇鼓)는 요고(腰鼓)와 비슷하며 조금 작으며 망치로 친다.


계루고(係累鼓)는 정원형으로 손으로 칠 수 있는 부분은 평평하고 수촌(數寸)[당악서]

가량 된다. 정고(正鼓)와 가고(加鼓)는 강국. 화고(和鼓)와 왕고(王鼓)는 안국(安國)

악기인데, 정고와 화고도 요고(腰鼓)류에 속한다(장사훈, 1988).


답랍고(答臘鼓)는 갈고(羯鼓)보다 넓고 길이는 짧으며 손가락으로 치는 북인데 해고(楷鼓) 라고도 한다. 도담고(導曇鼓)는 요고(腰鼓)와 비슷하며 조금 작으며 망치로 친다. 계루고(係累鼓 )는 정원형으로 손으로 칠 수 있는 부분은 평평하고 수촌(數寸)[당악서] 가량 된다. 정고(正鼓)와 가고(加鼓)는 강국. 화고(和鼓)와 왕고(王鼓)는 안국(安國) 악기인데, 정고와 화고도 요고(腰鼓)류에 속한다(장사훈, 1986).


동양의 전통악기 중에 고(鼓)에 속하는 악기를 살펴보면, 타이왕실의 무용음악 악기로서 타포네(Tapone) 양끝에 가죽이 있는 수평으로 된 북, 캄보디아 왕실무용음악 악기 스코르 톰(,Skor Thom)팀파니와 비슷한 큰북 2개, 자바왕실 무용음악악기 트즈블론(Tjblo n)qnr, 켄당(Kendang) 긴북, 베동(Bedong) 큰북, 일본 (뜨즈주메) 북 등이 있다(Xenia Zarina, 김인숙역, 1997).

1) 민중놀이로의 장고춤


 “향토축제는 신화적 뿌리가 있어야한다“ 또한 축제는 역사이다. 민중은 기념할 만한 날에 축제를 벌이기 때문이다. 각 절기 별로 축제를 벌이는 한국인이 믿었던 축제놀이의 근본은 어디에 있을까? 태양인가. 달인가? 해와 달과 별의 자연신앙을 통해서 한국인은 양과 음의 상극적이면서 조화적인 철학사상까지 발견하게 된다. 태극을 사랑하는 이원론의 조화가 그것이다. 양의 세계가 적극적이고 남성적인 세계라면 음의 세계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며 여성의 세계에 속한다. 음과 양의 두 세계를 조화시켜서 민속놀이는 줄다리기, 고싸움, 농기싸움 등의 표현 상징에서 알 수 있듯이 양(+) 음(-)의 대결을 설정하여 놀이나 경기를 즐긴다. 이는 다름 아닌 원시 심성을 지극히 잘 나타낸 풍요의 기원, 풍염의 기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차전놀이. 고싸움들의 놀이판이 둥근 원을 그리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먹고 마시는 음식과 그릇 하나마다 둥근 원, 곧 달과 해에 대한 유사, 감염주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고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추정해보면 장고에는 궁편과 채편이 있는데 궁편은 음(低音)을 의미하고 채편은 양(高音)을 의미하는 소리를 낸다.


      장고 통을 보면 오른편 채편 쪽의 통은 약간 가늘고 짧으며 왼편 궁편 쪽은 굵고 크다. 즉 해와 달의 상관관계요 남성과 여성의 상관관계와 비유된다는 사실이다. 음양의 조화를 이치에 둔 터일 것이다(임동권 외, 1989).


축제에는 가. 무. 악이 반드시 동반하게 되는데 이는 모인 민중들의 흥취를 더욱 돋우어 축제의 열기를 더 할 뿐 아니라 같이 즐기므로 인해 대동단결의 의미 또한 짙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굿이라는 일종의 제의식(祭儀式)을 통해서도 이런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명절놀이(지신밟기 및 농악놀이), 풍어기원 놀이(서해안대동굿 및 배연신굿, 동해안 별신굿, 남해안별신굿, 영동굿. 등등), 오락을 위한 놀이(놋다리밟기, 강강술래, 백중 놀이,길쌈놀이), 승부놀이, 전문인놀이(소 굿놀이 서해안대동굿, 배연신굿, 영산단오굿 오광대 놀음 북청사자놀음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강령, 봉산 은율 탈춤)등에서 모두 장고를 사용하게 된다(임동권외, 1989).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민속무용에 있어서 장고는 무용음악반주의 리더격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농악에 있어서의 타악기는 꽹과리, 장고, 징 ,북, 소고 등의 타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는 놀이이다. 마을의 당굿에서도 장고는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마을 두레패가 걸립을 할 때도 농악을 치게 되었다. 따라서 농악의 기능은 두레농악을 비롯하여 정초에 마을의 시조신인 서낭당에서 굿을 하고 마을의 지신밟기로 이어지는 당굿농악이며 공동체의 기금을 마련하거나 특별한 경비를 모금할 목적으로 하는 걸립농악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각 기능의 농악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판놀음을 벌리면서 예능이 집약된 판 굿이 있다. 장고를 메고 춤을 추면서 장단을 치는 맨 앞 설장고에 선 사람을 수장고(상장고), 부장고, 종장고(박은하, 2000) 등이 있으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억눌린 사회상에 해학과 유머로 민중의 시름을 달래 주었던 탈춤의 경우, 마을단위의 주민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달된 두레패적인 마을 탈놀이와 유랑예인들의 놀이로 된, 다분히 전문적이고 연희 적이며 직업화된 사당패적 탈놀음의 경우에도 장고의 역할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중의 축제에서 장고는 반드시 필수적인,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기방무로서 장고춤


 기생은 고려 문종 때 팔관회 여악 제도에서 비롯하였고 관기(官妓), (女妓), 여령(女伶) 등으로 불렸다. 장악원은 1897년 교방사(敎坊司)로, 그리고 1913년에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 雅樂部)로 바뀌었다. 그 전인 1907년 12월 조선정부의 직제에서 여악(女樂)제도가 폐지되었고 1910년에는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여악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여악과 악공 출신들은 민간으로 진출하여 자구책(自求拺)으로 새 공연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김경애 외, 2001). 그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이 필요했다. 1908년 9월 경시청은 기생들로 하여금 기생조합소를 조직하여 활동하도록 규제하는 시행령을 제정하였다. 그 후 서울과 평양 및 각 지역에서도 기생조합이 결성되었다. 그 후 명칭에서 기생조합과 권번이 혼용되다가 권번으로 귀착되었지만 기능은 같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42년에 일제 식민지 당국은 권번의 영업을 정지 시켰고 해방 이후 권번은 사라졌다. 1920년대 초에 서울의 한국 기생의 수는 444명이었고 24년 전국의 예기(藝妓)는 1313명, 40년경 서울의 권번 3곳에 적을 둔 기생은 9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서울 외에 기생출신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평양과 동래 등지가 꼽혔다(김경애 외, 2001).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기방에서 정재가 많이 추었던 사실이 1918년에 청유강태랑(靑柳鏹太浪)이 밝혀 출간된 [조선미인보감] (朝鮮美人寶鑑)에 나타나있다. 청유강태랑(靑柳鏹太浪)은 경성신문사장으로 있으면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조선기생들의 기예(技藝)에 반해서 아예 조선의 모든 기생들에 대한 사진과 기예(技藝), 이력(履歷)을 전 지역을 다니며 수집하고 조선 언문과 한문으로서 술(術)한 책이다. 가로 26cm, 세로18.5cm의 46배판 총 312페이지의 활자본으로 1918년 7월에 발간되었다. 인쇄소는 성문사(誠文史) 발행소는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 와 신구서림(新舊書林)이라 되어있다. 기록에는


비록 웃음을 파는 청루미인(靑樓美人) 곧 기생이라고 하나, 나중에 부호의 나중에 부호의 총첩(寵妾)으로 또는 남의 가정에 시집을 가게 될 터이므로 행신을 똑바로  해야 한다” 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제 그 폐막을 만일이라도 고쳐야 미인보감을 비로서 저술할 시 조선 전도청루 예기의 용태, 연추와 기예 우열이며 그 약력의 대저를 혹 포장도 하며 혹 평론도 하며 왕왕 경계하는 말을 기록하야 저의로 하야금 이 책을 재미있게 보아 부지불각 중 깨달음이 있어 용심 행신을 그르지 않게 하고 대인 접물을 바르게 할지면 사회에 적 이 유익함이 있으리라 하노라.


 이 글은 그 당시 한글로 써 내려간 것으로 받침이나 표현에서 약간의 수정이 있게 하였다. 한성권번에 있는 ‘김취홍’이란 기생이 장고를 메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김취홍’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기예(技藝)라고 표기 되어있고 가(歌), 가사(歌詞), 시조(詩調)(명창), 서도잡가(西道雜歌)(특등), 정재24종무, 현금, 장고, 장삼무 등을 그의 특기로 꼽고 있다.


‘김취홍’을 묘사한 글을 살펴보면,


눈에 익고, 귀에 젖은 평양 김취홍 운빈아미, 그림같이 잘도 생겼고,

세류춘풍 미태 있도다.

사람보고 반겨 라고 상끗 웃는양, 없던 정이 절로나니 입맛 붙고, 장고 메고 들락날락,

잡가(雜歌) 할 적에 아모라도 입에 침이 다 마르겠네.

산월명옥 멋 동무와 함께 서울 와, 자유영업 다동조합(茶同組合) 창설한

후로, 류(流)에 없는 춤 맵시와 노래 소리는 화류계에 첫손가락, 삼아 줄게요, 무릎 위에 삼척오동, 맑은 가락은 사마장경, 봉구황곡 다시 듣겠네.


이와 같이 1900년 초 기방문화에서 추어졌던 장고춤을 현대화시킨 최승희에 의해 오늘날까지,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무용가는 물론 각 국ㆍ공립무용단체에서 국내공연 및 해외공연에서 한국의 민속춤을 소개하는 소중한 레퍼토리로 선정되어 공연되어지고 있다.


3). 신무용기의 장고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모든 제도가 바뀌자 악원제도(樂院制度)와 여악제도女樂制度가 폐지되면서 왕실에 예속되어 무용을 맡았던 여령(女伶)과 무중(舞童)들도 해산하여 일부는 민간단체에 흡수되어 후진을 양성하거나 또 직접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궁중에서 상류층을 위해서 존재했던 궁중무용이 민간무용과 한 무대에서 관중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신무용기의 시작 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모든 무용 곧 궁중무용까지도 연희의 대상이 특정계층이 아닌 일반인을 위한 무용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이기도 하다(김매자, 1990). 한국무용사에서 신무용은 19세기 말까지 전통춤과 해방 이후 혹은 더 늦게는 1970년대 이후의 현대 춤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신무용이 신무용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먼저 한국적 몸짓 형식으로 다음에 한국적 정서와 소재를 다루었던 때문이다. 여기서 신무용을 근대적 접근으로만 평가 할 것이 아니라 전통춤을 근간으로 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무용 의 시대는 192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걸쳐 있었다고 볼 때, 1920년경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가 건립됨에 따라 넓은 마당이나 대청에서 추던 민속무용이 현대적 개념의 무대에서 추어지게 된다. 이러한 신무용 시대에 활동했던 무용가들 가운데 당시 민속무용의 주역으로는 한성준이 활약했다. 그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조선무용연구소’를 1934년에 열어 1938년에 원각사 무대를 시발점으로 하여 1941년까지 4년여 동안 민속무용을 공연함으로써 세련되고 틀이 잡힌 민속무용을 이룩하였다(김매자, 1990). 1926년 이시이바쿠(석정막)의 내한 공연으로 일반 국민들의 춤에 대한 인식과 감정이 달라졌다. 1930년 2월 서울 장곡 천정공회당에서 경성일보 주최의 제 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가지게 되면서 대 성황을 이루었으나 당시 동아일보 등에서 아직 이시이 바쿠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은 최승희는 자기만의 춤 세계를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이 때 조선 춤의 일인자인 한성준을 찾아간다. 한성준과의 만남의 기간은 이시이바쿠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기 세계를 찾아 나선 최승희 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일이였다(김채현, 1992). 이로 인해서 최승희가 전통춤에 근간을 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본 연구자는 최승희가 공연한 작품들 중에서 장고 춤을 공연한 것에 관점을 맞추어 추정해 보고자 한다. 당시 고수(鼓手)이자 무용가였던 한성준에게 춤을 배우면서 장고에 대한 영향을 받았던 그의 장고춤은 가락의 다양함보다는 장구를 메고 음악에 맞추어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경성신문사장 이었던 청유강태랑(靑柳鏹太浪 )이 기록하고 조선연구회에서 발행한(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의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조선 최대 규모였던 한성권번 (漢城券番)의 기생 김취홍이 장고를 메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최승희의 장구춤은 최초의 장구춤이 아니며 이미 조선말기에 기방문화에서 추어졌던 장고춤을 현대화 시켜 재구성 작업한 장고춤임을 추정해 본다. 하지만 최승희의 장고춤 공연으로 인해 그 이후 한국무용에서는 수많은 무용가들이 1970년대까지는 아주 활발하게 공연되어졌었다. 신무용기를 지나 근대무용으로 돌입하면서 소위 말하는 창작무용의 도입으로 우리의 민속춤들이 제자리걸음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한 실정이다.

Ⅲ. 장고춤의 실용화 방안


  1. 장고춤의 유형적 분석


사적 흐름으로 본 장고춤은 앞서 이론적 배경에서와 같이 그 성향을 근거로 민중놀이로서, 기방무로서 또한 무대화된 신무용기의 장고춤으로 다음과 같이 그 유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장고춤의 이러한 성향은 전승보전이라는 문화적 기대와 각각의 유형적 형태가 가진 고유의 예술적 효용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무용으로서의 활성화를 위한 전통예술의 체계적이고도 당연한 규명이기도 하다.  



2. 교육실용화 방안


 한 시대의 예술에는 흔히 서로 다른 많은 흐름이 있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에 있어서 민족적 정통성의 강조, 학문 세계에서의 국학에의 열기. 주체성 있는 교육지표의 강화, 그리고 민족적인 것의 세계성 이라는 제 3세계적 시야의 시대적 요청 등이 서로 엇물리면서 전통 예술 붐의 근원적 요인을 이루어왔음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파행적인 근대화 과정과 더불어 그것의 지지기반이었던 전통적인 삶이 아무런 방향 없이 그대로 와해되면서 인멸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질게도 여태 전승되고 있음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만도 아니고 여러 가지 보존 장치의 배려 때문만도 아닐 것이고, 나아가 위에서 언급한 배경 요인만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대중적 심성 속에서 비록 숨어 있으나 때가 이르면 그대로 분출 될 수 있는 민중문화 창조력의 원천으로서 신명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근본 정서는 한과 신명으로서 면면히 흐르는 한민족의 뿌리와도 같다.


      오늘날 대중적 삶의 상황이 외래 문명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인해 국민 정서의 근본 부터

      뒤흔들어놓는다하더라도 한민족의 피에 흐르는 전통성과 민중적 삶의 역사성은 맥을 같이  같

      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재해, 1988).


우리나라의 현 교육정책은 입시위주에서 탈피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관심과 초점은 입시에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자는 입시위주의 교육제도에서 탈피해야하며 전인교육의 프로그램에서 반드시 다음과 같은 교육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의무적으로 농악가락 및 기본 장단을 단계적으로 익히게 하고 학교행사를 통해 배운 가락과 몸짓을 실습하므로 실천적 교육실습현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우리 민족정서를 익히고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대동단결하는 차원에서도 매우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통합적인 교육 자료가 뒷받침되어서 모두 같이 익히게 하는 교육행정이 필요 하다. 또한 대학교육에서도 일부 대학 무용과 에서는 요즘의 창작 춤 지향적인 추세에 힘입어 전통춤은 무시한 채 창작 춤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짙다. 예술세계 이기 때문에 창작 춤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전통을 익히고 숙달시킨 다음 전통에 근간을 두고 추구하는 창작세계가 좀더 세계무대에 도전 할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 민속춤이나 전통 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과 춤 새나 느낌은 달리 존재한다. 그것은 단기간 내에 숙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습득 과정에서 한 작품을 한 학기에 수업한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보다 장기간 학습을 요하는 정서까지 완전히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21세기를 맞이해야 하는 우리는 한국전통무용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재고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문화 산업 예술의 발달이 관광 산업의 발전과 경제발전, 나아가서 문화의식의 발전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부와 학계, 무용계는 한국전통 무용의 보호 육성과 발전

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양선희, 1996).


따라서 전통무용예술의 맥을 잇고 장고춤의 장단과 신명으로 풍류적 기능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장고의 풍류적 가락을 전인교육의 방안으로 활용하여 몸에 익힘으로써 우리 민족적 정서인 한과 신명을 통해 민족예술에 대한 관심과 향흥을 일으킨다.

둘째, 신무용기의 장고무의 유형적 구조를 이론화하고 그로 인한 학문적 체계화를 통해 우리고유의 미를 찾고 현시대적 예술과의 조화를 꽤한 창작적 요소를 지향하는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셋째, 정부의 정책적 차원에서 장고춤의 대중화와 한국적 전통예술의 변형에 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보호육성에 대한 제도적 체제가 시급하며, 문화재 지정종목의 중요지원 외에도 창작적 실현이라는 적극성을 가져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고춤의 활용방안을 위한 전문 인력이나 각종 경진대회 등을 위시한 비중 있는 전통예술로의 인식변화가 요구된다.

넷째,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며 한국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창작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장고춤의 원류를 이해하고 민속놀이적 흥과 기방적인 풍류성, 토속적인 종교성을 한층 보완하여 기교의 다양화와 예술미의 극치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시 된다. 이는 대중성을 고려한 동서양의 교접을 시도하고 기방예술로서의 우아함과 섬세함에 놀이적 성격의 유희성, 한을 신명으로 대처하려는 민족의 근원적 성향을 대처하는 예술적 태도가 중요하다.  


3. 전통춤으로서 전승보전을 위한 예술적 실용화 방안


 문화의 전승은 고유성과 가변성 그리고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민속춤은 원형계승과 현대적 수용, 예술창조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술적 창조는 종합적 예능형태의 종교적 축제를 총체적 예술로 재창조해야 한다. 민속춤의 예술화에 있어서 즉흥적인 춤사위를 미적 형식에 입각하여 한국미를 상징하는 춤사위로 정립, 이것을 전승시키는 일이며 무대무용으로서 기법 개발도 일단 민속춤의 춤사위를 기초로 하여 할 것이다(임재해 1988).

장고는 타악기의 특성인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의 춤이 다 그렇듯이 신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 뒤에 숨겨져 있는 恨을 불러일으키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어떻게 타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과 한은 같은 맥락의 인간 감정이다. 인간은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리고, 슬플 때도 눈물을 흘린다. 이는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주어질 수밖에 현상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장고를 이용한 작품에서는 흥겨움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장고를 이용한 타주법에 따라 느낌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농악에서의 장고잽이들 외에는 장고춤은 여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무용수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장고를 이용한 남성춤을 개발할 수도 있다. 독무를 비롯해 군무구성에도 색다른 작품의 이미지를 연출 할 수 있다. 남성무용수들의 장고를 이용한 작품이 이루어진다면 아주 활달하고 힘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 할 수 있다. 또는 현대 창작춤과의 공존도 연구해 볼 수 있다. 장고의 모양을 변형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장고를 타주하는 무용만이 아닌 장고 자체를 무용의 도구로 따로 사용 할 수도 있다. 동서양권의 타악기와 함께 타주하며 악기를 표현하는 안무도 나올 법하다. 창작품으로의 장고의 이용도는 이 외에도 많다. 장고춤은 장구한 세월 우리 한국무용의 민속춤 부문에 있어서는 중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지만 각 개인의 춤으로 공연되어지므로 일관성 있는 체계가 필요 하다. 소중한 민속춤으로서의 가치를 학문적인 이론체계의 정립과 함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장고춤의 창작성은 무용예술의 진보에 필요한 중요한 교육적 과제가 되고 있음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장고춤에 대한 실용화 방안을 모색한다.  


첫째,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며 여성의 전유물로서만 인지되어왔던 장고를 남성무용수의 힘과 흥을 돋구는 놀이적 성향을 강조하고 기교적 힘과 리듬성을 극대화 하는 안무법을 시도하여 창작적 요소를 다양화한다.

둘째, 예술의 창조적 요소로서 미적요소는 가장 중요한 질적 요소로서 자리매김한다. 즉 장고라는 악기의 특수성 외에 다양화를 시도, 즉 소품으로서의 이미지를 개선하여 한국여성의 미를 극대화하고 기방무로서의 장고의 원류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교육적 기능을 무용제작법에 도입한다.

셋째, 현 교육제도로서 장고가 농악 반주를 위시한 악기의 기능 외에도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우리문화와 융합하여 창조된 장고춤의 역할을 인지하기 위한 이론적 지식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한다. 이는 교육자가 무용의 이론적 지식을 기반으로 예술적 창작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전통보존의 차원에 급급한 전통예술의 미를 모색해 다양한 무대예술로서의 시도를 가져오게 함이다.

넷째,  교육무용으로서의 장고춤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예술인력의 전문화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통합교육에서의 예술교육이 중요시된다. 무용학문의 다양한 접근은 예술의 다양한 시도를 가져오며 연구의 세분화를 통한 창조성에 효율성을 증대하기 때문이다.

Ⅳ. 결론 및 제언

연구자의 결론은 전통 민속교육의 바람직한 실용화 방안으로 초등교육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 시까지 음악시간과 무용시간을 통해, 우리 가락을 익히고 장단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농악가락 및 기본 장단을 단계적으로 익히게 하고 학교행사에서도 배운 가락과 몸짓을 통해 공연되어지는 과정으로 자연스러운 교육현장이 되어야한다. 장고춤은 리듬교육이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민족정서를 익히고 느낄 수 있으며, 대동단결하는 차원에서도 매우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통합적인 교육 자료가 뒷받침 되어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익히게 하는 교육행정이 필요 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민속춤으로서의 장고춤의 전통 보전적 차원과 풍류적 멋이 깃든 예술적 형태를 통해 그 원형에 대한 탐구가 앞으로 계승 발전될 한국 전통춤의 창조적 기반으로서의 이론적인 규명에 큰 의의를 가지며, 신무용기에 접했던 동서양의 세련된 공존적 양식의 유형적 특징을 논의함으로써 전통예술의 교육적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하여 나타난 연구 방향과 결론에 따른 제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는 문헌참고 와 논문 및 간행물을 통한 연구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승희에 대한 자료에는 비디오 테잎의 추가자료로 활용하였다. 선행연구의 부재로 심도 깊은 연구에 임하지 못했지만 좀더 넓은 학문을 바탕으로 통합적인 교육, 즉, 국문학 ,미학, 철학, 고고학, 체육학적인 분야의 체계적인 연구와 입증이 필요하다 하겠다.

둘째, 민중놀이로도 충분한 장고를 이용한 교육적 방안이 더욱 검토되어야 하며 다양한 안무적 동작과 함께 동양문화권의 타악기에 대한 비교연구와 더불어 타주법도 개발되어야 하겠다.

셋째, 신무용이라는 인식을 벗어나 민속춤으로서 전통성을 보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춤의 확립이 필요하며, 충분히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므로 전통무용으로 보전, 계승 발전될 수 있는 행정적인 방안까지도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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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혜 경